[김혜인의 반걸음 육아 40] 가을 여행

교사 김혜인 2024. 10. 15.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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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김혜인]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아. 여름엔 수박도 달고, 봄엔 참외도 있고, 목마를 땐 물도 달잖아. 그런 거 다 맛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빗소리도 듣게 하고, 눈 오는 것도 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한강의 자전소설 <침묵> 일부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기 훨씬 전부터, 이 소설은 육아 주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주 회자되곤 했다.

그가 선정됐단 전화를 받았을 때 아들과 함께 있었다고 해서인지, 다시금 <침묵>이 기사화되고 있다.

부부가 아이를 갖는 문제로 대화하는 장면이다. 아이를 갖는 일에 회의적인 아내에게 남편이 이렇게 말한 것.

한강은 여름엔 수박이 달다는 말만큼은 진실로 느껴져 느닷없이 웃음이 나왔다고 고백했다. 이 장면을 공유하는 이도, 이에 댓글로 반응하는 이들도 저마다 아이에게 맛보여 주고 싶은 음식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을 나열하며 행복해했다.

하지만 나는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수박 한 입 베어물게 하는 게 쉬운 줄 아나? 아이라고 눈을 다 좋아하는 건 아닌데!’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한쪽 입꼬리만 씰룩였다.

"세상에는 맛있는 게 정말 많아."

이유식을 시작하며 아이에게 말했다. 그러나 아이에게 여름 수박을 맛보이려던 시도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실패였다. 지난 겨울 눈밭에서 아이는 전혀 걷지 않았다.

요즘 아이가 제법 참을 줄도 알고 새로운 환경에도 곧잘 적응하길래 호기롭게 가을 여행을 떠났지만, 불과 이틀 만에 모두 취소하고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행지도 숙소도 모두 아이에게 맞춰 계획했지만 아이는 수시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숙소에서 나가려고 울다가, 문 밖을 나서자마자 들어오려고 우는 행동을 반복했다. 내게 팔을 뻗으며 안아달라 울고, 안으면 내려달라 울었다.

'너도 네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구나.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이 옆에서 나는 자주 넋을 놓아버렸다.

애초에 맛집 탐방은 생각지도 않았지만, 험난한 여행길에 편식과 음식 거부가 심한 아이를 먹이기만도 벅찼다.

이틀 내내 끼니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허기를 달래기 위해 숙소 내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 구운 달걀 따위를 샀다.

아이는 먹는 것뿐 아니라 낯선 잠자리 때문에 깊이 자지 못했다. 나 또한 육아 피로에 이번 여행의 고단함이 더해져 오히려 깊이 잠들지 못했다.

문득 한강의 <침묵>을 다시 읽고 싶어져 전자책을 결제했다. 잠이 든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에서 책을 읽으며 내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 생각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여름 무더위가 지긋하다 못해 무기력감마저 들 때, 갑자기 찾아오는 이 상쾌한 가을을 맛보여 주고 싶었다.

여행 셋째 날 아침, 피로로 인한 두통을 느끼며 개울을 끼고 이어지는 평탄한 전나무 숲길로 향했다.

높은 전나무와 그보다 더 높은 소나무가 어우러져 햇빛을 적당히 가리며 비춰 주었다. 종종 다람쥐가 내 앞을 가로지르며 달려 저쪽에서 잠시 멈췄다가 총총 사라지곤 했다. 개울은 굽이굽이 흐르다가 너럭바위 위에 고요히 모이고 다시 잔잔히 흘렀다. 이 물소리와 전나무와 다람쥐, 청명한 공기.

아이는 이 모두를 보지 못하고 유모차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한강은 아들과 차를 마시며 노벨문학상 수상을 조용히 자축하고 싶다고 했단다. 그의 아들, 지난 여름에는 '설탕처럼 부스러지는 붉은 수박'을 맛있게 베어 먹었을까. 빗소리와 눈 오는 풍경을 좋아할까.

전나무 숲에서 대추차 한 모금을 마시며 생각했다. 목마를 땐 물도 달다지. 물이 달기 위한 전제는 목마름이다. 이 가을의 상쾌함은 여름 무더위 뒤에 오듯이.

여름이 그렇게 더웠는데, 내 아이가 앞으로 이 가을 산책을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다. 숲길에서 이 곤한 낮잠이 이미 보여주듯이.

|김혜인. 중견 교사이자 초보 엄마. 느린 아이와 느긋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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