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실천 촉구하고, 부동산 스캔들 풍자… 정육 정물화가 외치는 ‘정의’[양정무의 미술과 경제]
안트베르펜 항구도시의 풍요 반영
한편 그림 뒤에 숨겨진 이야기도 있다. 황소 머리 위에 십자가 모양으로 포갠 두 마리 청어 뒤편으로 나귀를 탄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고 옆에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다. 이는 신약 성경 속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여기서 마리아로 보이는 여인이 굶주린 아이에게 빵을 주고 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넘쳐나는 물질적인 풍요를 강조한 듯하지만, 배경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먹을 것을 나누는 장면을 숨긴 것이다. 풍요 속에서 나눔을 실천하라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나아가 마리아가 굶주린 아이에게 자선으로 주는 빵은 ‘영적인 음식’이 되고, 반면 푸줏간의 식재료들은 ‘물질적 음식’이 되어 영육의 대비를 이룬다.
이 그림 이전에는 교훈적인 내용을 전면에 크게 그리고, 사물은 배경에 소품처럼 집어넣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전통적 화면 배치를 완전히 뒤집고 있다.
이렇게 음식이나 과일, 꽃, 기타 사물 등을 그린 그림을 스틸 라이프(Still Life), 또는 정물화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보면 아르천의 푸줏간 그림은 서양미술에서 정물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아르천이 활동하던 안트베르펜은 당시 유럽의 최고 항구 도시였다. 1501년 포르투갈 상인이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향신료와 사치품을 안트베르펜에 싣고 온 후로 안트베르펜은 원거리 무역을 통해 가져온 물품들이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가는 중간 기지가 된다. 이렇게 되면서 당시 유럽 물자의 40% 이상이 안트베르펜을 거쳤다고 한다.
이렇게 유통과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안트베르펜에서는 금융업까지 성장한다. 증권거래소, 환전소, 대부업까지 활발해지면서 안트베르펜은 엄청난 경제적 호황을 누린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인구도 10만 명에 육박하면서 지중해 무역의 중심 베네치아를 능가한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안트베르펜의 정육업자들도 번영을 맞이한다.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더라도 법적으로 정육업자의 수는 62명으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정부로부터 독점권을 가졌던 정육업자들은 막대한 부를 모을 수 있어 16세기 초 자신들의 협회가 자리할 건물을 당시 안트베르펜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짓기까지 했다.
공정 경제 강조하는 메시지 녹여
흥미롭게도 이 그림이 그려지던 당시 안트베르펜에는 큰 스캔들이 벌어진다. 토지 부족에 시달리던 정부가 수녀원 소유의 땅을 헐값에 매입하지만, 이것을 악독한 개발업자에게 더 헐값에 판 것이다.
아르천의 그림 오른쪽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여기엔 “여기 뒤쪽에 있는 154로트(rod)의 땅을 전체든 부분이든 원하시는 만큼 팝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154로트의 땅은 당시 안트베르펜 시정부가 헐값에 매각한 땅과 같은 규모의 땅이다. 넘쳐나는 식재료를 통해 당시 정육업자들의 번영을 그리는 듯하지만, 당시 벌어진 경제적 스캔들을 포함해 아무리 개인 사업자들이 노력하더라도 사회의 경제적 정의가 무너지면 모두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는 그림이기도 한 것이다.
아르천의 그림은 넘쳐나는 먹거리로 당시 안트베르펜이 누렸던 경제적 풍요를 찬양하면서, 여기에 나눔의 실천과 경제적 정의를 촉구하는 메시지까지 촘촘히 담고 있다. 500년 전 그림이지만, 표현 방식뿐만 아니라 사회적 덕목까지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그때와 지금이 여전히 시장경제의 울타리 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렇게 보면 아르천의 그림은 정물화의 시작을 알리면서, 동시에 소비주의 빛과 그림자를 다룬 중요한 그림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 같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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