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원의 말의 힘]라틴어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라틴어도 처음에는 가난했다. 그 시절에 로마인들이 했던 일은 그리스 작가를 모방하고 번역하는 것이었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한글 작품 대부분이 <월인석보> <두시언해>와 같은 언해들이었던 한국어의 초기 상황에 비견된다. 아무튼, 일찍이 그리스어는 일상생활에서도 라틴어를 압도했는데,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의 칼을 맞는 순간에도 그리스어로 “아들아, 너마저(kai su, teknon!)”(수에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전(傳)>, 82장)라고 했다고 한다.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라틴어의 가난함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스인들이 발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라틴어로 포착하여 선명하게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네. 특히 처음 접하는 사태와 말의 가난함으로 인해 단어들을 자주 새롭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네.”(<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1권 137~139행)
호라티우스도 라틴어의 가난함 때문에 아주 고생한 시인이었다. 그의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 전혀 알려지지 않는 것을 표현해야 한다면, (중략)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말을 새롭게 만드는 일은 시인의 특권이네. 이는 허용되어 왔고 또 언제나 허용되어야 하네. 마치 곤두박질치며 저물어가는 한 해를 따라 숲을 채웠던 잎들이 떨어지듯이, 그렇게 처음에 있던 단어들도 시들어 사라지고, 젊음의 힘이 그러하듯, 새로운 단어들이 태어나서 자라 번성하고 만발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네.”(<시학> 46~59행)
말의 가난함을 극복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말을 만들”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라틴어가 학술어와 문명어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산고의 고통 덕분이었을 것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라틴어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어의 가난함에 몸부림치며 고생하면서 한국어의 숲을 풍성하게 채우는 사람들, 번역가·학자·시인·이야기꾼들에게 위로와 감사의 말을 전한다. 라틴어처럼, 한국어에도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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