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기준

이정엽 국립부산국악원장 2024. 10. 15. 19: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정엽 국립부산국악원장

훈련병이 되고 나서 학창 시절 겪은 이런저런 일들이 군대문화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중 하나가 제식 훈련인데 성장기의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기준’이라는 단어를 다의적으로 해석하는 장애 아닌 장애를 느낄 때가 있다.

뙤약볕이 내리쬐던 운동장. 연단으로부터 “누구누구 기준”에 이어 몇 열 종대 또는 횡대를 만들라는 호령이 떨어지면, 기준에 맞춰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무리 전체가 허둥거렸고, 연이은 새로운 호령은 마치 무리를 집어삼키는 혼돈의 회오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기준이라는 단어를 원뜻과 동떨어진 혼란과 강압적 요구로 인식하는 비정상적인 심리 반응이 생기곤 한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혼란을 떠나, 기준은 본질 또는 상대성을 가늠하는 척도이자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변화의 기반으로 사회의 규칙과 절차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 첫걸음이 간혹 나의 경우처럼 혼란스럽거나 강요로 느껴질 수 있지만, 무엇을 가늠하고 무엇을 만들기 위한 기준인가, 즉 기준의 대상에 따라 변화를 겪는 과정과 결과를 모두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

10월 26일은 ‘계량측정의 날’로 세종대왕이 도량형을 정비해 계량체계를 확립한 1446년 10월 26일을 기념해 1970년 제정됐다고 한다. 길이 부피 무게를 측정하는 도량형을 통일하거나 정비하는 것은 경제 활동과 조세 등 국가 운영에 중요한 일이며, 이를 제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도량형기, 예를 들면 길이를 잴 때 쓰이는 자와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당시 도량형의 기준이 되었던 도구는 황종척(黃鍾尺)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 황종척이 음악과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황종척에 대한 설명은 조선의 통치 이념이었던 예악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예악은 예법과 음악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예’는 질서, ‘악’은 조화를 의미한다. 유교 성리학을 수용한 조선의 통치자들은 이상 국가를 만들기 위해 인간 사회에 필요한 질서를 예법, 조화를 음악으로써 구현하고자 했으며 이 둘은 상호 보완과 조절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음악 제도를 정비하는 것은 이상 국가 실현을 위해서도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세종대왕은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음악 제도를 정비하며 당시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황종관을 제작했다. 황종관은 12개 율관(음높이의 상대적 관계를 규정해 만든 원통형 관)의 하나로, 음을 조율할 때 사용하는 피치 파이프와 비슷하다. 대나무 관을 울려 소리를 낼 때 상대적으로 짧은 관은 높은음, 긴 관은 낮은음이 나는데 당시 이러한 물리적 현상을 이용해 특정 길이의 관을 삼등분해 1/3만큼의 길이를 더하거나 빼는 방법으로 12개의 음을 산출해 음악에 사용했다. 이때 기준이 된 특정 길이의 관이 황종관이며, 노랑이 의미하는 방위가 중앙인 것을 생각하면 황종은 중심음 즉, 기준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황종관의 길이를 황종척으로 해 길이를 재는 기준으로 삼고, 황종관에 담기는 기장(곡식)의 양을 기준으로 부피를, 황종관에 가득 채운 물을 기준으로 무게를 측정하는 도량형의 기준과 세부 단위를 정비해 계량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음악과 관련한 기록이 많다. 세종대왕은 음악에 대한 조예도 깊었고 심지어 음악적 능력 즉, 음악성까지 뛰어났던 것 같다. 악기의 아주 미세한 음조차 구별해 정확하지 않음을 인지할 수 있는 절대 음감의 소유자였으며, 용비어천가를 가사로 직접 곡을 만든 작곡자의 면모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음악과 관련한 많은 기록 중에, 음악 제도를 정비하려 했던 목적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곡들이 있다. ‘백성과 함께 즐기고(여민락), 평화를 이룩하며(치화평), 풍요를 누린다(취풍형)’. 그에게 있어 백성은 상대성이 존재하지 않는 본질이자, 새로운 질서의 목적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백성의 후손으로서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그를 왕 중의 왕으로서 추앙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