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폭력과 트라우마의 보편성 [신진욱의 시선]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다양한 각도에서 그에 대한 의미 부여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무엇보다 이것은 특별한 문학적 사건임에 틀림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의미심장한 사회학적 현상이기도 하다는 점을 눈여겨보게 된다.
폭력과 트라우마의 문제와 씨름해 온 한국의 작가가 세계의 공감을 획득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사건은 대한민국 발전사의 한 절정인가, 아니면 발전 신화의 해체인가? 한국 사회의 잔혹한 이면을 비추는 이야기들은 어떻게 세계의 치유에 기여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좀 더 넓은 문화 변동의 맥락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최근 십여년간 세계의 찬사를 받은 한국의 문화생산물들은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 있다.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 ‘설국열차’, ‘기생충’ 같은 사회비판적 영화들로 세계적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넷플릭스 역대 최고 흥행작이 된 ‘오징어 게임’은 살인적 경쟁 사회의 공포와 긴장을 극한까지 고조시킨 작품이다. 한강 작가는 5·18을 소재로 한 ‘소년이 온다’, 4·3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 가족애의 끔찍한 이면을 그린 ‘채식주의자’ 등의 작품들로 노벨상을 비롯한 많은 영예로운 수상을 했다.
장르는 다양하지만, 이들의 공통된 주제는 ‘폭력’이다. 국가의 폭력, 자본의 폭력, 경쟁의 폭력, 가족과 가부장의 폭력 등 다양한 양태의 폭력에 대한 질문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다름 아닌 폭력의 문제와 대결한 이 작품들이 세계에서 강렬한 공명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경험이 보편적 의미를 획득하는 양상이 과거와 근본적으로 달라졌음을 시사한다.
그동안 대한민국이 무엇으로 세계에 알려지고 세계와 이어졌는지를 돌아보자. 처음에 한국은 그저 전쟁으로 파괴되고 가난한 나라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후 한국은 전혀 다른 상징성을 갖는 ‘모델’로 세계에 등장했다. 1980년대에 세계는 한국을 ‘고속 성장’, ‘경제 기적’의 대표 사례로 탐구했고, 1990년대엔 ‘성공적 민주화’, ‘산업화와 민주화의 동시 달성’에 대한 찬사가 더해졌다. 2000년대부터는 그간의 압축적 발전이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자의식을 표현하는 ‘선진국’ 담론이 정부 문서와 대중매체를 장악했다.
이 같은 ‘승리 서사’들은 한국의 현대사와 오늘의 사회 현실 속에, 인간에 대한 잔혹한 폭력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이 가득 차 있다는 진실을 외면하고 억압해 왔다. 왜냐하면 그것을 허용한다는 것은, 마땅히 세계에 경탄의 대상이 되어야 할 ‘케이(K)-모델’에 흠집을 내고 ‘1등 한국’의 이미지에 때를 묻히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바로 그 폭력의 역사를 치열하게 성찰하는 한국의 문화생산자들이 세계에서 큰 지지를 얻고 있음을 보고 있다. 세계 최빈국에서 출발해서 세계 10대 경제강국, 수출대국, 군사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기적을 이뤘다는 나라, 하지만 세계에서 자살률 최고, 산재사망률 최고, 출산율 최저, 행복도 최저라는 이 나라는, 현대성의 상반된 두 얼굴이 극단적 대조 속에 하나의 머리에 붙어 있는 곳이 아니던가.
세계는 그처럼 현대성의 빛과 그림자, 그 분리 불가능한 두 측면의 모순이 극한까지 농축된 ‘너무나 한국적인’ 경험에 접속하는 가운데, 현대라는 보편적 시공간에 놓인 그들 사회의 이중성을 돌아보는 계기를 발견한다. 여기서 세계가 보는 것은 한국 사회의 폭력성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창을 통해 선명히 드러난 폭력의 보편성, 현대의 보편적 폭력성이다.
그처럼 폭력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단지 역사의 증언이나 현실 고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엔 치유를 통해 현실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트라우마의 본질은, 너무 아픈 어떤 것이 어느 날 내 안에 들어왔는데 그것을 밖으로 빼낼 수도 없고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도 없어 그저 아픈 가시가 박힌 채로 있어야 하는, 그 회피 불가능성과 통합 불가능성의 모순적 공존에 있다. 그리고 그 모순이 표현 불가능성, 즉 언어의 실종을 초래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한스 요아스에 따르면, 그 무언의 자물쇠를 여는 길은 바로 이야기하고 공감받는 경험이다. 이를 통해 그간 무너졌던 자아가 재건되었을 때, 지금껏 그의 침묵을 전제로 유지된 사회관계는 흔들리고 그를 주체로 받아들인 새로운 관계가 생겨난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개인들이 겪은 폭력의 경험을 어루만지는 이야기들은, 이처럼 세계의 모든 곳에서 그와 같은 폭력을 겪은 사람들의 재건의 과정으로 스며든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강 작가에 대한 일각의 불편함은 단지 그가 독재정권의 폭력을 비췄다는 정치적 이유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이승만에서 시작된 국난 극복의 신화 대신에, 그 역사가 강요한 인간의 비참과 그 속에서 빛난 숭고한 인간성에 대한 공감이 지금 한국과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가 되었다는 데 있다. 강자에 동일시하고 힘의 논리를 숭상하는 한국의 지배 문화는 이 같은 수준의 도덕적 보편성에 범접할 수 없다.
한반도에 핵전쟁의 위험이 극에 달했던 2017년 10월에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한강 작가는 “인간이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최후의 저지선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온전하고 진실한 인식”이라고 썼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단순한 연민을 넘어서는 실천적 의지와 실행이 매 순간 우리에게 요구된다는 사실도.”(‘누가 ‘승리’의 시나리오를 말하는가?’, ‘문학동네’ 통권 93호) 그렇다면 우리는 한강 작가를 향한 우리의 시선을 돌려, 그가 가리키는 세상을, 그와 함께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태원에서 수백명의 젊은이가 끔찍하게 생을 마쳐도, 아리셀 공장 화재 참사로 수십명이 숨져도, 쿠팡 노동자들이 연이어 과로로 쓰러져도,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무심하게 가던 길을 가는 이 섬뜩한 사회에서 어떻게 타인에 대한 온기가 살아 있을 수 있으며, 연대가 피어날 수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여름의 소년들에게’)면, 그것은 단지 작가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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