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해낸다… 짙푸르고 질긴 정신의 창대한 결과 '대한민국' [작가와의 대화]

최진숙 2024. 10. 15.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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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시인의 고통이여 나의 친구여 !
■ 한국인의 부뚜막 정신 ■
"그래도 니는 될끼다" 한국의 어머니 는 떠받쳐 올리는 힘이 아니던가. 한 강의 노벨 문학상도 이런 힘의 돌출 구로 탄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무(無)를 유(有)로 만들어 나라를 재건축한 힘의 나라. 가난하고 배를 주리면서도 책을 폈고 결국은 지식의 세상을 폈던 것이다.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한국의 피는 붉다. 그러나 그냥 붉은 것이 아니라 가을 햇볕에 맑은 하늘을 담아 발효시킨 고추처럼 붉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피는 푸르다. 그냥 푸른 것이 아니라 한여름 진초록 잎새 끝에 흐르는 진액처럼 푸르다. 무조건 내가 태어난 나라라고 해서 치켜올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생각해 보면 한국은 그런 낭랑한 피로 무(無)를 유(有)로 만들어 나라를 재건축한 힘의 나라라고 말해도 된다. 지금 이 나라를 재건한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들은 가난하고 배를 주리면서도 책을 폈고, 그 책을 넘어서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낸 것이다. 보리 한주먹이 없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면서도 내일의 우리나라가 사람 사는 나라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땅을 팠던 것이다. 어디 책상이라는 것이 있었던가. 아궁이 위 찌그러진 솥이 걸린 그 옆에 손바닥만 한 평평한 곳에서 책을 펴고 글씨를 썼던 그 세대들이 결국은 노동의 가치를 넘어 지식의 세상을 폈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부뚜막 정신이라고 불렀다. 한국인의 정신에 이만한 것도 없다. 책상이 없다면 나뭇잎 위에도 책을 놓고 봐야만 하는 당찬 정신이 바로 한국인의 고추정신이 아닌가. 그러니 안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더러 자기 것을 파먹고는 텅텅 비어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인이 아니다. 진정한 한국인은 "없다"가 아니라 그래서 "할 수 없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 해내는, 해내야만 하는 것이 한국인의 붉은 피의 상징인 것이리라. 자신에게 오는 달갑지 않은 '걸림돌'도 거뜬히 스스로의 맨몸으로, 불의 정신으로 '디딤돌'로 만들어 고통의 위기를 건너갔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인의 정신이다.

이 세상 우리가 흔히 한국인을 '빨리빨리'의 대명사로 부르지만 나쁘지 않다. 이 빠른 정신이 오늘의 한국 토목공사가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터널을 뚫고 산을 지나가는 길을 만든 것도 바로 그 '빨리'의 정신이다. 한국인에게는 '막차의식'이 있다. 마지막 기차를 놓치면 안 된다는, 어느 나라처럼 지금 못 가면 내일 가고 내일 못 가면 모레 가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은 막차를 못 타면 죽는다는 각오로 모든 장애물을 비집고 그 기차를 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탄다. 그러면 꼭 그 기차를 타야 하는 지상 절대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집단 속에서 그저 늦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집단적 흥분과 스스로의 강압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힙쓸려든다. 이것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처지지 말라"는 자기 암시가 그토록 급하게 거의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면이 없지 않다. 다 좋을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면이 결국 "해내고 만다"의 경지로 가는 것이다. 많은 부작용을 거쳤다. 아니 지금도 겪고 있다. 마지막이란 말에 한국인은 절박해진다. 연애도, 학교도, 직장도, 돈에서도 이 마지막은 피를 끓게 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 현실에서 대학 진학으로 이어 직장에서 진급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뚜막은 순수 욕망이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함은 더러 거친 욕망이나 과도한 욕망으로 자기를 패하게 하는 경우가 있지만 손바닥만 한 부뚜막의 온기는 인간까지 순하게 만들어 할머니 그 할머니 어머니들이 오늘의 삶을 이어준 것이다.

내 어머니는 무학이다. 학교 부근에도 가본 적이 없다. 여자는 남자 아래에 머물러야 이치에 합당하다고 생각한 여자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느 날 아침 깨달은 부처처럼 우리에게 말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고 소리치시던 그 어머니가 얼굴 표정도 단호하게 으름장을 놓으며 말했다.

"이 세상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없다."

이 말을 연거푸 세 번을 힘주어 말하고는 "알아들었제. 못 알아들었나!"

너무 뜻밖이어서 딸들은 어안만 벙벙 어머니를 쳐다보기만 했다. 제2의 인생이라고 장독대 위 호박 하나를 탁 깨트리며 강연하듯 말하는 어머니는 도무지 무슨 일을 겪었을까. 아무리 얼굴을 들어도 시어머니, 남편 모든 가족들이 꾹꾹 눌러 사람 대접이 아니라 개 대접도 못 받는 하루하루를 겪으며 어머니는 스스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나는 아니야, 나는 틀렸어, 내 딸들이라도 사람 대접을 받게 해야 해, 결국은 교육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셋째 딸을 1955년 거창에서 마산여고로, 1957년도에 넷째를 마산여고를 보내 졸업시켰는데 집안 어른들의 그 전쟁 같은 반대로 몸도 마음도 상했지만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다섯째인 나에게 말했다.

"마산은 터가 나쁘다. 넌 부산으로 가래이."

나는 거창이 좋다고 떼를 쓰고 가지 않았다. 거창여고 1학년 가을 어머니는 집에 들어가는 나에게 말했다.

"내일 너 부산 간다. 부산에 학교하고 하숙집 얻어 놨다."

그렇게 나는 부산의 여고생이 되었고 그다음엔 동생 둘도 모두 서울로 고등학교를 보냈다. 무슨 원수 갚듯 자식들을 도시로 보내면서 어머니는 만족하셨을까. 한 가지 어머니의 작심은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나를 포기하면 저절로 자식들도 포기하는 '포기덩어리'가 아니라 나는 내리고 자식은 올리는 어머니식의 인생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를 만족시킬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빛이 아니라 어둠만 밝히는 어느 날 절망에 처한 나에게 "그래도 니는 될끼다"란 단 한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으셨다. 나는 그 말 한마디를 지팡이로 오늘까지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의 이 짙푸르고 질긴 정신을 나는 한국인 부뚜막 정신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어머니는 언제나 풀리는 힘이 아니라 떠받쳐 올리는 힘이 아니던가.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도 이런 힘의 돌출구로 탄생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심으로 한국의 힘을 느끼는 순간이다. 부뚜막 정신을!


신달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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