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읽기] 중장기계획 남발 시대의 국회

2024. 10. 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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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정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서울=뉴스1) = 정부 중장기계획은 체계적인 정책 추진을 위해 수립되는 5∼10년 단위의 행정계획으로, 법률에 근거한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중장기계획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962년부터 1996년까지 총 7차에 걸쳐 수립·집행됐고, 그사이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1961년)에서 9433달러(1997년)로 115배가 뛰는 눈부신 성과를 냈다. 잘 짜인 계획을 빈틈없이 지켜내며, 우리나라는 중장기계획의 마법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가 발생했고, 1998년 김대중 정부는 IMF의 요구로 민간 경제활동 자유 보장과 시장경제질서 편입, 재정 안정화를 근거로 경제개발계획을 폐기했다. 재정정책, 공공재 관리 등 꼭 필요한 영역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가급적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라는 IMF의 권고를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우리 정부는 중장기계획을 수립·집행해 정책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의 정책 추진 방식을 폐기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너무나 많은 중장기계획이 우후죽순처럼 수립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중장기계획은 2019년 534개에서 2022년 679개로, 약 27% 증가한 것으로 짐작(?)된다. 연구자로서 부끄럽지만, 2024년 기준으로는 훨씬 더 많은 중장기계획이 수립·집행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단언컨대 현재 추진되고 있는 정확한 중장기계획의 숫자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정부 업무를 총괄한다고 할 수 있는 부서인 국무조정실에도 기획재정부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누구도 대한민국이 700여 개가 넘는 중장기계획을 수립해, 나아가고자 하는 항로를 알지 못한다.

중장기계획은 단기 운영 목표와 장기 비전 사이의 격차를 좁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략적 계획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중장기계획을 통해서 의도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조직의 다양한 부서와 개별 실행단위에서 발생하는 전략적 이슈를 식별하고 미션, 목표, 전략, 행동 등에서 발생하는 비일관성(inconsistency)과 불일치(misalignment)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장기계획의 폭증은 법정계획 간 연계성, 정합성, 일관성 등의 측면에서 문제를 유발하여 효율적인 정책 집행과 정책 효과성 제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렇다면, 중장기계획이 수없이 수립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책확장(policy expansion) 개념을 적용해 정책의 채택을 내외부의 정치적 압력에 대한 능력과 의지를 가진 관할 부처의 대응이라고 전제하면, 중장기계획을 수립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문제는 일회적인 정책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지속적인 정책 수립을 필요로 한다. 정책확장은 정책 수립에 대한 압력이 해소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지속적인 정치적 압박에 대한 관료의 대응은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의 경향을 보인다. 즉, 발전국가의 경험을 통해 정부 주도의 사회문제 해결이라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지속적인 중장기계획의 수립은 정책확장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중장기계획은 일반적으로 법제화 과정에서 기관의 설치와 시설, 설비·현황에 관한 사항 등을 포함하며,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실태조사, 관계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의 연도별 세부 실천계획, 실천계획과 추진실적의 점검과 평가 등에 관한 사항으로 이뤄져 있다. 요컨대, 법정계획은 관료에게 기구와 정원, 예산 확대의 수단으로 기능하게 된다. 한편, 중장기계획의 수립은 정치인에게도 무형의 이익을 가져온다. 소속 위원회 소관 부처의 법정계획 수립에 따라 신설되는 조직과 예산은 자신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장기계획의 집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계획 간 중복이나 상충, 조정 문제는 소관 부처의 문제이다. 이처럼 관료와 정치인의 이해가 일치하기 때문에 중장기계획이 증가하기 쉽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정부 중장기계획의 수립은 법제 의사결정 과정의 산물이다. 국회에서의 상례화된 의사결정을 통해 중장기계획 수립이라는 루틴(routine)이 작동한 것일 수 있다. 조직루틴은 선택적으로 작동하는데, 대표적인 매커니즘이 주의(attention) 집중과 분산이다. 의사결정자가 주의를 집중하면 루틴에서 벗어난 의식적 의사결정이 나타날 수 있지만, 주의가 집중되지 않을 때는 상황의존적 또는 환경반응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자동적 의사결정이 나타난다. 중장기계획 수립의 필요성을 검토하기보다는 상례화된 중장기계획 수립 관련 조항이 포함된 법률안을 원안대로 수용하거나 체계자구를 고치는 수준에서 법안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의사결정자의 주의가 집중되지 않음에 따라 조직루틴에 의거한 무비판적 답습이 이루어진 결과로 중장기계획이 증가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장기계획이 남발되는 시대에 국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법률을 고안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에 수립된 중장기계획 간의 관계와 우선순위를 파악할 수 있도록 관련 법률들을 깊이 있게 재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관련 법률 간의 체계성을 높이고 수많은 중장기계획의 구조를 우선순위에 맞추어 재정립하여 대한민국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에 맞추어 다종다양한 정책들의 대오를 정렬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새로운 국회의 개원 초기에 이전 국회에서 제정된 중장기계획 수립 조항을 포함한 법률들에 대한 재검토를 바탕으로 관련 법률들의 제·개정 사항 등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는 1~2년 기간의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검토 보고서를 바탕으로 의원들이 기존 법률의 개정과 신규 법률의 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국가미래전략이 다듬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한번 잘 짜인 중장기계획의 안전망 위에서 대한민국의 도약을 꿈꿔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채정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미래읽기 칼럼의 내용은 국회미래연구원 원고로 작성됐으며 뉴스1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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