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카세 1호’ 김미령 셰프의 ‘인생의 맛’ [플랫]
오후 5시. 손님이 가득 들어찬 가게가 잠시 조용해진다.
“오늘 밑반찬 10가지와 김치를 제외하고 총 20~22가지 음식이 나옵니다. 신선한 제철 재료로 정성 들여 만드는 음식이니 맘껏 즐겨주세요. 잘 모시겠습니다.”
셰프의 인사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대감과 배고픔에 부푼 박수가 터져 나온다. 먹음직스러운 밑반찬들은 이미 열을 맞춰 테이블에 준비 완료. 이제 김미령 셰프가 차려내는 푸짐한 가을 제철 한 상을 즐길 차례다.
요리 인생 40년, ‘흑백요리사’에 도전장을 내다
서울 도봉구의 한식 요릿집 ‘즐거운 술상’을 운영하는 김미령 셰프(49)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화제의 인물이다. 지난 8일 최종회를 공개한 넷플릭스의 요리 서바이벌 <흑백요리사>에 ‘이모카세 1호’로 출연한 그는 대한민국 요리계의 스타 셰프(백수저)와 재야의 고수(흑수저) 100명이 벌인 ‘요리 계급전쟁’에서 한식 한 상의 맛깔난 손맛을 보여주며 최종 6위를 차지했다.
오후 2시, ‘즐거운 술상’에서는 한복을 차려입은 김미령 셰프가 저녁 장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ㄷ’자 모양의 테이블 위에는 오늘 손님상에 오를 고사리무침과 애호박볶음이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풍기며 한 김을 빼고 있었다. 그는 이곳 ‘즐거운 술상’과 서울 경동시장에서 손칼국수로 유명한 ‘안동집’을 운영하는 오너 셰프다. 매일 시장에서 점심 장사를 마치고 저녁 장사를 위해 이곳으로 출근한다.
‘즐거운 술상’은 메뉴가 정해져 있지 않고 그날그날 신선한 재료로 만든 요리를 손님상에 내놓는 일명 ‘오마카세’(맡김 차림)집이다. 운영 시간은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하루 3시간, 최대 스무 명의 손님을 받는다. 음식이 워낙 푸짐하고 맛있어 식객들 사이에선 이미 명성이 자자한 곳. 김미령 셰프가 ‘이모카세 1호’라는 별명으로 방송에 등장했을 때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눈 깜짝할 사이에 맛깔난 양념의 겉절이 한 통이 완성됐다. “잡숴보시라”며 직접 한입 넣어주는 겉절이를 호로록 받아먹었다. 알싸하면서도 칼칼한 맛에 찡하게 군침이 돈다. 그에게 요즘 인기를 실감하는지 묻자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스타일인데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더 늘었다”며 웃는다.
톱 8에 유일하게 이름 올린 한식요리사
<흑백요리사> 섭외 연락을 받고 촬영 시작 전까지 ‘계급’ 설정에 대해 전혀 몰랐단다. “현장에서 제가 흑수저라는 걸 알고 처음엔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는데 백수저들을 보니 워낙 유명하신 분들이더라고요. 이런 기회에 그분들과 한자리에서 요리해보는 것도 영광이겠다 싶었죠.”
1라운드에서 푸짐한 제철 한식 한 상을 ‘뚝딱’ 차려내 백종원 심사위원의 호평을 받은 그는 2라운드 흑백 블라인드 미션에서 고등어를 주제로 <마스터 셰프 코리아 1>의 우승자인 김승민 셰프와 붙었다. 결과는 2 대 0 김미령 셰프의 완승. 얼큰한 국수에 고등어 향을 구수하게 살린 ‘고등어 어탕국수’로 까다로운 두 심사위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한식에 친숙한 재료인 고등어를 그의 주특기인 국수로 풀어낸 메뉴였다.
“냉장고를 열고 고등어를 보자마자 ‘이건 내가 이길 수 있겠다’라는 느낌이 왔어요. 어머니 고향이 경북 영주, 아버지가 충북 단양이에요. 저는 단양에서 태어났고요. 어렸을 때부터 냇가에서 잡은 민물고기로 매운탕을 자주 해 먹었거든요. 고등어 비린내만 잘 잡으면 되겠다 싶어서 껍질과 가시를 깨끗이 제거하고 어탕국수를 만들었어요.” 심사장에 들어가 두 눈을 가린 두 심사위원을 보고 오히려 잘됐다 싶었단다. “겉모습은 투박하지만 맛으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거든요.”
흑수저와 백수저가 함께 팀을 이룬 레스토랑 미션에서는 ‘캐비어보다 맛있는 김’으로 화제가 됐다. 도대체 어떤 맛이길래. 방송을 본 이들이 제발 김 좀 팔라고 아우성이다. “비결은 별거 없어요(웃음). 참기름과 들기름을 1 대 1 비율로 섞은 뒤 김에 잘 발라주고 소금을 살짝 뿌려 구우면 돼요. 불 조절이 중요해요. 기름을 바른 김은 열에 민감해서 센 불에 금방 수축하거든요.” 조만간 식당 차림에 김을 추가할 예정이라니 운이 좋으면 화제의 김을 맛볼 수도 있겠다.
그는 한겨울 추위에 떨며 요리했던 기억도 잊지 못할 추억이라고 말했다. 방송에선 매회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경쟁자였지만 함께 출연한 요리사들과 3개월 동안 동고동락하며 정이 많이 들었다. ‘철가방 요리사’ 임태훈 셰프, ‘만찢남’ 조광효 셰프와는 누나, 동생 하는 막역한 사이가 됐다고. “원래 밥장수가 밥을 굶는다”며 장사하기 바빠 다른 식당들을 많이 다녀보지 못했다면서도 임태훈 셰프가 운영하는 중식당 ‘도량’은 꼭 가보라고 추천한다.
험난한 미션을 거쳐 그는 내로라하는 중식, 일식, 이탈리아식 요리사들과 함께 유일한 한식 요리사로 톱8에 이름을 올렸다. 6등으로 경연을 마무리한 아쉬움은 없을까.
“시원섭섭해요. 대단한 분들과 함께 요리하고 겨뤄본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제가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고 할까, 주변을 돌아볼 시간 없이 너무 앞만 보고 살았더라고요.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가 됐어요. 최선을 다했고 후회는 없어요.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요리를 하고 싶어요.”
발레리나 꿈꿨던 소녀, 국숫집 안주인이 되다
5시가 되자 ‘즐거운 술상’이라는 무대의 막이 올랐다. 20명의 예약 손님이 모두 착석한 뒤 간단한 인사를 마친 김미령 셰프가 본격적으로 음식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살구빛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전복회를 필두로 버섯구이, 해삼·멍게, 보쌈, 가지구이, 왕가리비찜, 햇감자전, 낙지숙회, 꽃게찜, 두부전, 조기구이, 백숙, 비빔밥, 떡볶이, 토스트 등 열거하기에도 숨이 찬 20여가지 메뉴가 3시간에 걸쳐 손님상에 차려진다. 20인분의 산해진미를 차려내는 솜씨와 맛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탱글탱글하고 따뜻한 식감을 잃지 않도록 음식을 내는 순서와 타이밍 또한 정확하다. 음식을 내며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는 여유까지, 대단한 내공이 아닐 수 없다.
김미령 셰프는 딸부잣집 네 자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남부럽지 않았던 어린 시절은 잠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며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시장 한편 노점에서 국수장사를 시작하셨다. 담백하고 깔끔한 정통 안동식 손칼국수로 유명한 ‘안동집’이다. 20여년 전 어머니로부터 가게를 이어받은 김미령 셰프는 남편과 함께 하루 1000명 이상의 손님에게 국수를 대접하는 경동시장의 명소로 식당을 키워냈다. 국수는 그의 ‘인생요리’고, ‘안동집’은 그가 요리와 인생을 배운 곳이다.
“중학교 시절 학교가 끝나면 책가방을 메고 바로 시장으로 갔어요. 엄마 장사를 도우며 어깨너머로 국수를 배웠죠. 그러다 엄마가 당뇨합병증으로 양쪽 눈 수술을 하시고 제가 20대 후반에 가게를 이어받게 됐어요. 어렸을 땐 국수가 참 싫었어요. 근데 그렇게 싫었던 국수 덕분에 생계를 유지하게 됐고 가족이 행복하게 먹고살 수 있게 됐으니 저에게 국수는 은인과 같은 음식이에요.”
어린 시절 그의 꿈은 발레리나였다. 20대 땐 서울랜드 무용단 소속 무용수로 공연에 참여하기도 했고 에어로빅 강사로도 활동했다. 그랬던 그가 네 자매 중 유일하게 가업을 잇게 됐으니 요리는 그의 운명이었던 걸까. 그렇게 국수를 만들며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가게를 늘리고, 양가 부모님을 모셨다.
“어렸을 땐 집안 형편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던 아쉬움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전혀 없어요.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우리 가족이 행복하고, 제 음식으로 다른 사람들도 즐겁게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죠.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올림머리, 한복 입고 요리하는 이유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손맛뿐 아니라, 타고난 눈썰미와 손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요리사로서 김미령 셰프가 가진 무기다. 쉴 틈 없이 손님이 몰려드는 점심 장사 시간, 정신없이 국수를 내는 와중에도 단골들의 입맛과 취향을 꼼꼼하게 챙긴다.
“어떤 손님은 호박을 많이 넣은 걸 좋아하시고 어떤 분은 국물이 적은 걸 좋아하세요. 어떤 어르신은 이가 약해 너무 뜨거운 걸 싫어하시는데 그분이 오면 국수를 찬물에 한번 헹궈서 내요. 최대한 맞춰드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요.”
전통시장에서 오래 장사하다 보니 찾아와주시는 분들을 위해 음식 맛은 물론 위생과 서비스 면에서도 예의를 갖춰야겠다 싶었단다. 값비싼 음식은 아니더라도 손님들이 대접받는 기분으로 식사를 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게 올림머리를 하고, 항상 깨끗한 한복을 입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즐거운 술상’은 따뜻한 집밥을 먹으며 소주 한잔할 수 있는 곳이 동네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10년 전 차린 곳이다. 국수가 주메뉴인 ‘안동집’과 달리 정해진 메뉴 없이 철 따라 다양한 음식을 낼 수 있는 맡김 차림 방식을 택했다. 오늘은 어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까 고민하는 일이 즐겁다니 이 일이 천직이구나 싶다.
‘즐거운 술상’에는 음식을 내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신선한 제철 재료’로, ‘정해진 양’만, ‘조화롭게’다. 여러 가지 음식을 함께 먹는 한식은 음식 하나하나의 맛도 중요하지만 상에 오르는 반찬들과의 조화도 중요하다. 짜거나 강하지 않게 균형 잡힌 간은 기본, ‘계절감’이 모두 담겨야 만족스럽고 풍족한 한 상이 된다고.
“미리 만들어두지 않고 매일 예약 인원만큼 재료를 준비해 당일 소진해요. 때를 못 맞춰 식거나 한번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온 음식은 처음 맛을 내지 못하거든요. 예약 손님이 서너 명뿐이던 시절에도 그 이상 손님을 받지 않았어요.”
인생처럼, 음식에도 온기 담고파
원래도 예약하기 힘든 식당으로 유명했던 ‘즐거운 술상’은 방송 이후 자리 잡기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예약 시작 3분 만에 20명 좌석이 모두 마감됐다. 하루에 1000통 넘는 전화를 받다 보니 그의 휴대폰은 말 그대로 불이 날 지경이다. 음식 준비하랴, 전화 받으랴 “이걸 혼자 한다고요?” 백종원 심사위원이 했던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런데 쉴 틈 없이 울리는 전화에도 짜증은커녕 얼굴 한번 찡그리는 법이 없다. 오히려 예약이 마감됐다는 말에 서운해하는 손님들을 달래며 “두어 달 지나면 여유가 생길 테니 다음에 꼭 찾아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찾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영업시간을 좀 늘려도 되지 않을까?
“손님을 더 받거나 장사 시간을 늘릴 생각은 없어요. 딱 이 정도가 제가 가장 행복하게 손님들을 맞을 수 있는 인원이거든요. 연말쯤엔 예약상황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그때 잊지 말고 꼭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 드시러 와주세요.”
마지막으로 김미령 셰프의 인생은 어떤 맛인지 물었다.
“생각해보면 제 인생은 맵고 쓰고 짤 때가 많았던 것 같아요. 힘들어서 불평하기도 했고 내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죠. 그런 우여곡절을 지나고 보니 이제야 온기 있는 마음으로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화려하진 않지만 누군가를 미소 짓게 하는 맛, 그게 지금 김미령의 인생의 맛인 것 같아요.”
▼ 노정연 기자 dana_fm@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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