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하듯 수사하지 말라’는 제도적 명령, 예심판사
수사·기소권 ‘분점’하는 프랑스 검사와 예심판사 ②
수사·기소할 대상자를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막강한 권한입니다. 이러한 선택에 이어 실제 수사·기소까지 하나의 기관이 주도하게 되면, ‘표적 수사·기소’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런 위험을 막기 위해 프랑스는 이 권한들을 분리해 ‘선택’ 단계는 검찰이, ‘수사·기소’ 단계는 예심판사가, 이후 ‘재판’ 단계는 다시 검찰이 담당하도록 분산시켰습니다. 지난번 이야기(6회 프랑스 혁명 후 분리된 ‘수사·기소’…“다 주면 폭군 나와”)에서 다룬 내용입니다. 프랑스 예심판사 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보겠습니다.
예심판사의 또 한가지 주목할 특징은 ‘수사 대상자의 혐의를 뒷받침하는 증거’와 함께 ‘그의 결백을 뒷받침하는 증거’도 수사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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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최근 논란이 된 재판 장면을 하나 들여다보겠습니다. 지난 9월10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위증교사 혐의 공판에서 검찰은 핵심 증거인 음성 녹취를 틀었습니다. 그러나 발췌본이었습니다. 이 대표 변호인이 ‘이 대표에게 유리한 부분은 뺀 채 짜깁기했다’며 반발하자 재판장은 녹음파일 전체를 끊지 않고 틀도록 했습니다. 9월30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는 이 대표 쪽이 또 다른 녹취를 공개했습니다. 변호인은 “해당 녹음파일은 (수사기록) 목록에도 없다. 그러다 보니 등사(복사) 신청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대표에게 유리한 내용의 녹취를 검찰이 입수해놓고도 일부러 감춰왔다는 것입니다. 검찰이 이래도 될까요? 검찰은 이 녹음파일에 대해 “혐의를 더욱 뚜렷하게 입증하는 증거”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미리 공개하지 않았을까요?
‘유죄 증거’와 ‘결백 증거’ 모두 수사해야 하는 예심판사
이 사례는 ‘수사기관이 피의자에게 유리한 증거도 수집해 제출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상기시키는 전형적 상황입니다. 프랑스 형사소송법은 분명하게 답합니다. “예심판사는 유죄의 증거와 마찬가지로 무죄의 증거도 찾아야 한다.” 이른바 ‘객관 의무’입니다. 예심판사가 수사를 마친 뒤 마지막에 작성하는 문서에는 수사 대상자에게 불리한 증거와 유리한 증거를 함께 명기하도록 역시 법에 규정돼 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도 변호인은 어떤 부분을 수사해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고, 예심판사가 이를 거부하려면 이유를 제시해야 합니다. 거부 이유를 납득할 수 없을 때는 상급 법원 예심부에 항고할 수 있습니다. 또 예심판사가 확보한 증거와 자료 등은 변호인에게 모두 제공됩니다. 재판과 마찬가지로 수사 과정에서도 피의자가 방어권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가 철저히 정보비대칭의 열세에 놓이는 우리나라 제도와 비교되는 지점입니다.
한 예로, 김건희 여사에게 명품가방을 건넨 최재영 목사가 최근 검찰 조사 때 작성된 자신의 진술 조서를 확인하고자 했으나, 검찰은 거부한 바 있습니다. 본인의 진술 내용도 보여주지 않을 정도니, 수사 대상자가 그밖의 수사 자료를 확인한다는 건 언감생심입니다. 심지어 수사기록을 당사자에게 보여주도록 법원이 명령해도 검찰이 거부하는 상황까지 벌어집니다. 검찰이 수사 대상자나 피고인의 정당한 이익을 옹호해야 한다는 건 당위로만 존재할 뿐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고 있습니다.
흔히 검찰 수사를 두고 ‘사냥하듯 수사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목표를 정하면 다른 사정은 살피지 않고 그 방향으로만 내달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선 객관 의무라는 건 아예 기대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예심판사는 수사를 담당하는 수사기관인 동시에 불편부당해야 하는 사법부 소속 법관이기에 ‘객관 의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심판사의 임무는 유죄를 받아내는 게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것으로 규정됩니다. 한마디로 ‘사냥하듯 수사하지 말라’는 제도적 명령인 것입니다.
반면 경찰과 같은 일반적 수사기관은 수사 대상자의 대척점에 서서 그를 처벌하는 데 몰두하게 마련입니다. 검찰도 형사재판의 한 당사자로서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는 게 주된 역할이라는 점에서 예심판사와 구별된다는 게 프랑스 제도에 함축돼있는 기본적인 시각입니다. 다만 2016년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객관 의무를 검찰에도 부여했습니다.
“인생 절단내는 기소”, 제도적으로 객관성 보장해야
재판에 넘겨지기 이전 단계인 수사 단계에서부터 이렇게까지 객관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뜻밖에 윤석열 대통령이 한 바 있습니다. 대선 후보 시절인 2021년 11월 대학생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기소를 당해 법정에서 상당히 법률적으로 숙련된 검사를 만나서 몇년 동안 재판을 받고 결국 대법원에 가서 무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인생이 절단난다. 판사가 마지막에 무죄를 선고해서 여러분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다. 여러분은 법을 모르고 살아왔는데 형사법에 엄청나게 숙련된 검사와 법정에서 마주쳐야 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재앙이다. 검찰의 기소라는 게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기소하지 않고, 기소해야 될 사안을 봐주지 않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기소는 그만큼 신중해야 하는 국가권력의 행사입니다. 객관적인 중간자 입장에서 충분히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특히 예심판사는 중대한 범죄를 주로 수사합니다. 잘못 기소될 경우 입게 되는 피해는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중대 범죄를 수사하는 기관일수록 편파적이지 않고 공명정대해야 할 필요성도 그만큼 커집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중한 기소를 예심판사나 검사 개인의 자질에 맡기는 게 아니라 제도적으로 규정하고 보장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프랑스에서 예심 결과 불기소 처분되는 비율은 꽤 높습니다. 2022년 통계를 보면, 예심 수사 대상자 3만2032명 중 약 23%인 7470명이 불기소 처분을 받았습니다. 검찰이 수사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해 예심판사에게 넘긴 중대 사건들 가운데 4분의 1 가까이가 불기소로 마무리된 것입니다. 예심 과정에서 객관성·공정성이 담보된다는 방증으로 이같은 수치가 인용되곤 합니다.
“가장 큰 권력” 가졌으면서 “불쌍하고 외로운” 존재
예심판사의 또 한가지 독특한 성격은 철저히 ‘단독자’라는 점입니다. 재판을 하는 판사와 마찬가지로, 예심판사는 비록 법원에 속해 있지만 자신이 맡은 사건은 철저히 독립적으로 처리합니다. 이는 위계질서로 짜인 조직에 속한 검사와 다른 점입니다. 조직으로부터의 단절은 수사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장치입니다. 조직적 이해관계에 따라, 또는 상부의 압박에 따라 수사가 왜곡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직을 뒷배로 한 무리한 수사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진보·보수 정권을 가리지 않고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밀어붙여 많은 예심판사들의 롤모델이 됐던 르노 반 륌베크 예심판사가 지난 5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1970년대 보수정권인 지스카르 데스텡 대통령 당시 총리 물망에 오르던 노동장관의 부패 혐의를 밝혀내 ‘빨갱이 판사’로 불렸습니다. 1990년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당시에는 집권 사회당의 비리를 수사해 좌파의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언론들이 장문의 부음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근엄한 외양과 달리 쾌활한 성격이었던 그는 방 한켠에 ‘럭키 루크’(미국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만화 주인공) 캐릭터 포스터를 붙이고 이런 캡션을 달아놓았다고 합니다. “나는 불쌍하고 외로운 예심판사다! 나는 불쌍하고 외로운 예심판사다!”
예심판사를 두고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사람’(발자크)이라는 세평과 ‘불쌍하고 외로운 사람’이라는 자조가 엇갈린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양자 모두 예심판사의 독립성이 갖는 중요성을 짚어낸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우트로 사건’과 예심판사의 실패
예심판사 제도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큰 논란을 불러온 게 ‘우트로 사건’이었습니다. 올해 넷플릭스에 이 사건을 다룬 3부작 다큐멘터리 ‘우트로 사건: 프랑스의 악몽’이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2000년 발생한 우트로 사건은 무고한 시민들이 아동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누명을 쓰고 장기간 구금되는 등 인권침해를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심판사의 수사 실패가 비판받으면서 예심판사 폐지론까지 불러일으켰습니다.
10살 소녀가 부모와 이웃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게 드러났는데, 아이의 어머니가 예심판사에게 실제 범행에 가담한 4명 이외에 이웃 14명을 공범으로 지목했습니다. 허언증에 따른 허위 진술이었습니다. 피해 어린이들도 더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해당 어린이들도 이 여성의 진술에 부합하는 말을 했습니다. 나중에 드러난 바로는, 혐의자들에 대한 비난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경험이 부족했던 젊은 예심판사는 허위 진술에 속아 18명 모두를 재판에 넘겼습니다. 한 명은 억울함을 호소하다 구속 중 자살했고, 2004년 1심 재판에서 10명 유죄, 7명 무죄라는 엇갈린 판결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허위 진술을 했던 여성이 2005년 2심 재판에서 자신의 진술이 거짓이었음을 실토하면서 사건의 실상이 명확해졌습니다.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던 6명에 대해 검찰은 무죄를 구형했고,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대통령, 총리, 법무장관 등이 이들에게 사과했고, 국회가 진상조사에 나섰습니다. 예심판사가 주요 사건을 단독으로 처리하다 보니 경험 부족 등으로 인한 오류를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지적에 따라 2007년 프랑스 국회는 3명의 예심판사가 합의체를 구성해 예심을 이끄는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정치적 영향 받는 검찰은 믿을 수 없다
이후 2009년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대통령은 예심판사 제도 폐지를 본격 제안하며 대통령 직속 사법개혁위원회를 만들어 검토하게 했습니다. 위원회는 예심판사를 없애고 모든 수사를 검사에게 맡기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사법관 노조와 대법원, 변호사협회 등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 입법이 무산됐습니다.
폐지 반대 주장의 주된 근거는 예심판사의 역할을 검찰로 넘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검찰이 수사·기소 권한을 모두 갖게 되면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고, 수사에 대한 법원의 통제가 이뤄지기 힘들다는 점을 꼽았습니다. 검찰이 수사를 전담하고 법원은 영장심사 등을 통해서만 수사를 통제할 경우(지금 우리나라의 상황과 같습니다), 법원이 수사의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 채 검찰의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진정한 수사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행정부 소속으로 정치적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검찰은 수사·기소에서 법원 소속의 예심판사만큼 중립성을 지킬 수 없다는 우려도 컸습니다.
예심판사의 권한은 우리 기준으로 볼 때 과도한 면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구속 여부를 직접 결정하던 권한은 폐지됐지만, 여전히 통신 감청 등을 직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예심판사가 수사 뒤 기소 여부까지 결정하는 것보다 검사에게 기소 여부 판단을 넘김으로써 수사·기소 권한을 더 명확히 구분할 필요도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심판사 제도는 수사·기소 권한을 검찰과 분점해 상호견제하고 수사의 객관성과 독립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가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200년 넘은 예심판사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는 우리의 형사사법체계 개혁에서도 중요한 참고가 될 것입니다.
10월29일 다음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박용현의 ‘검찰을 묻다’는?
검찰공화국을 사는 요즘 시민들에게 검찰에 대한 상식은 교양필수가 됐습니다. 무겁지 않게 검찰에 대한 질문을 하나씩 던지고 독자 여러분과 생각을 나누겠습니다. 격주 화요일 낮 12시에 새로운 글이 올라옵니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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