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의 육식[소소칼럼]

홍정수 기자 2024. 10. 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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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같이 피가 모자란 사람들은 넘의 살을 먹어줘야 해,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닮아 철분도 혈압도 정상치에 못 미쳤던 어린 나를 위해 부지런히 푸줏간을 드나들었다. 네 나이 때 나도 현기증 때문에 아침에 머리를 못 들어서 학교도 못 간 날이 허다했는데, 어쩜 너도 똑같니. 그녀는 유전의 족쇄를 안타까워하는 한편으로 유전의 힘을 신기해하며 말했다.

피가 모자란 모녀와 먹성 좋은 부자는 갖은 명분으로 일주일에 몇 번씩 전기 불판에 ‘남의 살’을 구웠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기에 대한 남매의 이해는 불고기와 삼겹살을 진작에 넘어 부챗살과 치맛살, 스지와 도가니를 구분할 줄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

학원비 대신 고깃값을 들여 키운 남매는 과연 정상치를 살짝 넘어선 기골장대한 성인으로 자라났다. 가장 알맞게 고기를 굽는 법을 일찌감치 가정에서 터득한 나는 집 밖에서도 자부심을 갖고 집게와 가위를 들곤 했다.

더 이상 ‘남의 살’이 필요치 않다고 느낀 건 아마 스물일고여덟살쯤이었을 것이다.

직장에 들어간 뒤에도 한동안 키가 자랐다. 170cm를 코앞에 두고 마침내 성장을 멈췄지만, 여전히 성장기 못지않게 고기를 먹었다. 달라진 건, 엄마가 VIP 손님 가격에 떼어온 푸줏간 고기가 아니라, 룸을 갖춘 전문 식당에서 직원이 구워주는 고기의 비중이 늘었다는 점이다.

기자가 된 뒤 받은 첫 출입처는 서여의도에 있었다. 나는 곧 여의도가 ‘법카’로 돌아가는 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욕망과 욕심, 야망과 질투로 가득한 그 섬에서 나는 하루 이틀 걸러 한 번꼴로 취재원들과 소 등심과 안심을, 또는 고급 참치와 스시 정식을, 또는 원가를 짐작할 수 없는 중식과 양식 코스를 먹었다.

해를 넘겨도 계속되는 음식의 향연에 마음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이 돈은 출처가 어디일까. 나와 호스트의 관계에 왜 이런 대접이 필요한 걸까. 이런 음식을 일상처럼 먹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 도달했다. ‘우리, 이 고기와 이 살들에 이렇게 둔감해져도 되는 걸까.’
민소한우 홈페이지 캡처

고깃집 메뉴판에 인쇄된 고깃덩이 사진은 너무나 정갈해서 때론 공산품이나 예술작품처럼 보인다. 한때 어떤 동물의 일부였다는 것을 감추려는 듯 잘 꾸며놓은 선홍빛 피사체를 바라볼 때, 내 상상은 자꾸만 그 너머, 그 이전으로 거슬러 간다.

새빨간 구슬처럼 익은 사과, 가을 들녘에 늘어진 황금빛 벼, 푸르고 촘촘하게 돋아난 상추. 농산물은 수확하는 순간의 모습이 매번 탐스럽다. 식물이 식재료가 되는 과정엔 본능적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왜 나는 동물이 식재료가 되는 순간은 왜 그리도 혐오스럽고 비윤리적으로 느껴질까. 우리가 이토록 매일같이 고기를 포식하는 게 자연의 본능이라면, 살육(혹은 수확)의 장면 역시 탐스럽고 자연스럽다고 느껴야 하는 것 아닐까.

내 본능을 확인하기 위해 살아있는 돼지를 도축하는 희귀한 영상, 소를 공중에 매달아 처음부터 발골하는 영상을 찾아본 적도 있다. ‘인도적이고 현대적인’ 전기충격 도축 장치를 홍보하는 영상이었지만, 시선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보기 위해선 두 눈을 부릅뜨려 애써야 했다.

감옥 같은 케이지에 동물들이 ‘효율적’으로 밀어 넣어진 영상들은 한결 찾기가 쉬웠다. 평생 옴짝달싹도 못 한 동물들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내 마음은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아무리 인간의 본성이 잡식동물이라도, 이 규모, 이 밀도, 이 빈도의 육식은 분명 틀린 것이라고.

소설 ‘채식주의자’에는 등장인물 영혜의 독백이 이탤릭체로 서술된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어느 날 갑자기 육기(肉氣)를 끊는 인물 영혜를 둘러싼 이야기다. 자신의 살아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실은 파괴와 죽음으로 촘촘히 쌓아 올려졌다는 깨달음에 전율하던 영혜. 결국 극단으로 치달아버린 그는 ‘남의 살’을 제 몸에서 덜어내며 서서히 소멸하는 길을 택하고 만다.

종교적 제한도, 의료적 이유도, 동물권에 대한 헌신도 없으면서 갑작스럽게 고기를 끊은 영혜는 내게 뜻밖의 작은 동질감을 선사했다. 물론 그녀와 나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점들이 있다. 나는 5년쯤 전부터 육식과 거리를 두고 있지만, 까탈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지기 싫은 자리에선 여전히 종종 고기를 먹는다.

어금니로 고기를 씹을 때 나는 분명한 감칠맛과 기름진 풍미를 느낀다. 다만 어릴 때와 달리 지금은 작은 소름들이 순간적으로 날갯죽지와 두피를 훑고 지나감을 함께 감지한다. 사과를 베어 물 때 햇볕을 떠올리듯, 고기를 삼킬 땐 생전 그의 삶을 내내 관통했을 고통이 스친다.

아마 어떤 이는 내 정신이나 사회성에 문제가 있다고 나지막이 혀를 차겠지만, 내게 이것은 극히 사실적이고도 실존적인 문제다. 돌이켜보면, 이토록 습관처럼 관성처럼 육식을 한다는 것이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놀랍고도 또 파괴적인 일인가.

난 스스로를 채식주의자라고 감히 칭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입에 무심코 들어갔던 ‘남의 살’이 어디에서 어떻게 온 것인지를 의식하기 시작한 뒤로 내 삶은 많이 달라졌다. 한 입 한입에 죄책감과 고마움을 느낀다. 그것을 반드시 느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업보를 가능하면 조금씩 줄여나가고 싶다는 것이 내 ‘채식 지향(志向)’의 지향이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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