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우의 ‘국어 교과서 명문’에서 배운다
[편집자주] 많은 리더가 말하기도 어렵지만, 글쓰기는 더 어렵다고 호소한다. 고난도 소통 수단인 글을 어떻게 써야 할까? 리더가 글을 통해 대외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노하우를 구체적인 지침과 적절한 사례로 공유한다. <백우진의 글쓰기 도구상자>와 <일하는 문장들> 등 글쓰기 책을 쓴 백우진 글쟁이주식회사 대표가 연재한다. <편집자주>
언론인이자 사학자였던 천관우(1925~91)는 명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가 쓴 그랜드캐년 기행문은 세월이 70년 넘게 흐른 지금도 이처럼 인용되고 읽히고 있다.
김 부총장은 내용과 서사(敍事), 수사(修辭)를 두루 갖춘 글쟁이. 영화로 제작된 〈남산의 부장들〉로 서울의 지가를 높였다. 그는 〈관훈통신〉 2022년 1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훗날 그랜드캐년을 하루 동안 여행하면서도, 또 다른 묘사 글을 읽으면서도, 천 주필의 그런 필력의 경지는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해, 천관우를 경외하면서 사숙(私淑)했음을 내비쳤다.
그랜드캐년 기행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K형, 황막(荒漠)한 미개경(未開境) 애리조나에 와서 이처럼 조화의 무궁을 소름 끼치도록 느껴보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웅혼 괴괴(怪怪)한 절승(絶勝)의 그 한 모퉁이나마 전해드리려 붓을 들고 보니, 필력이 둔하고 약한 것이 먼저 부끄러워집니다.”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겸손한 태도보다는 편지라는 형식이다.
글쓰기는 어렵고 말하기와 소통 방식이 달라서도 어렵다. 말은 듣는 사람의 표정을 살피면서 설명을 추가하거나 순서를 바꾸거나 되짚거나 할 수 있는데, 글은 독자의 반응이 없는 가운데 써야 한다. 그런 가운데 정리된 원고는 종종 독자의 이해와 공감을 벗어난다. 이런 위험은 전문가에게서 더 커진다.
심리학·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는 〈글쓰기의 감각〉에서 “이해되지 않는 글이 쓰이는 주요 원인은, 필자는 자신이 아는 무언가를 모르는 독자의 처지를 떠올리기 어렵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런 ‘지식의 저주’ 때문에 “논문부터 무선 홈 네트워크 설치 안내문까지” 이해가 어려운 글이 작성된다고 예시했다.
편지 형식은 지식의 저주에 빠질 위험을 크게 낮춘다. 편지 투로 쓰면 독자를 대표할 만한 지인을 한 명 상정하고 그에게 쓰는 편지에 내용을 담을 경우 상대방의 반응을 떠올리며 조곤조곤 서술하게 된다. 그래서 국내 필자 중 일부는 가끔 서한문 형식으로 수필이나 칼럼을 쓴다.
◇눈앞의 독자에게 말한다고 상상하라
다만 편지 형식은, 적당한 배경이 있지 않다면, 수십 편에 한두 번 정도만 구사하기를 권한다. 자주 편지 투로 글을 쓸 경우 독자는 금세 매너리즘에 질려 그 필자의 글을 멀리할 공산이 커진다.
천하의 문사(文士) 천관우도 편지 투를 이 기행문 외에는 거의 활용하지 않은 듯하다. 한편 천의무봉의 천관우는 서한문 형식이 아니었더라도 명 기행문을 썼을 것이다.
서한문에 버금가는, 독자와 눈높이를 맞추는 서술 방식이 없을까? 핑커는 독자가 어깨 너머로 글을 읽고 있다고 상상해보라고 조언한다. 국내 언론계에서 내려온 조언은 이런 상황을 설정한 가운데 쓰라는 것이다. ‘독자가 눈앞에 있고 당신은 그에게 들려주면서 그 내용을 글로 쓴다.’
다음으로 본받을 점은 문장의 길이. 얼핏 이 기행문은 만연체 장문 위주로 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음 문장들이 그런 인상을 줄 수 있다.
◇풍부한 내용에는 장문이 효과적
장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방금 살펴본 것처럼, 기기묘묘하고 변화무쌍한 광경을 전하는 데에는 이렇게 한데 담아 서술한 장문이 효과적이다. 이로써 우리는 국내 글쓰기 분야에 널리 자리 잡은 틀린 지침인 ‘글을 단문 위주로 쓰라’를 반박할 수 있다. 이 지침을 편의상 ‘단문주의’라고 하자.
한 대학교수가 쓴 글쓰기 책 중 한 장은 ‘짧은 문장은 언제나 옳다’이다. 이 장에 세계적인 작가 스티븐 킹이 인용됐다. 유혹하는 글쓰기〉로 국내에 소개된 킹 책에서 인용된 대목을 훑어봤다. 교수의 주장과 달리 킹은 군더더기 부사를 쓰지 말라고 했지, 문장을 짧게 치고 나가라고 조언하지는 않았다.
◇천관우의 말년과 오버랩되는 종결부
놀라운 점은 이 글을 천관우가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썼다는 사실이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총명함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가 다섯 살 때부터 글을 읽고 썼다는 기사가 1934년 〈동아일보〉에 실렸다. 그는 194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고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진학했다.
1949년 작성한 학부 졸업논문 ‘반계 유형원 연구’는 실학의 개념과 발전 과정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이후 실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근세 조선사 연구〉 등 다수의 역사연구서를 저술했다.
1951년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여러 활자매체를 거쳐 동아일보에서 주필로 활약했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거구의 천관우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또는 지키고자 버틴 거대한 보루였다. 1968년 신동아 필화사건으로 언론계를 떠났다.
이후에도 반독재·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그의 비중은 해방 후 지성사를 인물 중심으로 서술한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에 그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로도 가늠할 수 있다.
천관우는 말년에 그동안의 경로와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쿠데타에 이어 광주에서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에서 관변 단체의 주요 직책을 맡는다. 언론사를 나온 후 연구와 저술로 보낸 10년간 생계가 곤란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을 지키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이후 평생 함께해온 민주화 진영으로부터 완전히 외면받는다.
김충식 부총장은 “그 글의 마무리, ‘피니시 블로’는 더없이 멋졌습니다”라고 했다. ‘그랜드캐년’의 다음 종결부는 그의 말년과 오버랩된다. 최근 타계한 남재희 장관은 〈언론·정치 풍속사〉 중 그에 대한 글을 ‘아깝다’고 마무리했다.
“출발점으로 돌아오니 벌써 어두웠습니다. 인디언의 춤이 시작되었습니다. (중략) 상반신을 벗고 요령을 흔들면서 하는 춤도 있고, 벼슬이며 우모(羽毛)며 닭의 모양을 하고 나온 춤도 보여줍니다. 왕년에는 이 대륙을 독차지했던 이 겨레이건만 오늘은 춤이 끝난 뒤에 백인들이 던져주는 돈을 주우면서 ‘생큐, 생큐’를 연발하고 있는 그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0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백우진 글쟁이(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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