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훼손 수입품 금지법’도 연기… ‘갈팡질팡’ EU 기후 리더십[Global Window]

이현욱 기자 2024. 10. 15.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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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lobal Window - 곳곳에서 거센 반발… EU ‘녹색정책’ 흔들
지난 상반기 유럽의회 선거 직전
대규모 농민 트랙터 시위가 기점
처벌 대신 ‘인센티브 확대’ 전환
규제 피로감에 극우정당 대약진
우선순위 ‘환경 → 이민’ 옮겨가
정치양극화에 각정부 손발 묶여
기본적인 문제 합의에도 어려움
지난 2월 프랑스 농민 시위대가 유럽연합(EU)의 토지 휴경 의무 제도와 경유 면세 단계적 폐지 등 환경규제에 항의하기 위해 파리 남부 고속도로를 트랙터로 점거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기후 위기 속에 글로벌 녹색 정책을 주도해오던 유럽연합(EU)이 기후 리더로서의 위상을 잃어가고 있다.

강력한 환경 규제에 산업계는 물론 각국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유럽 각국이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친환경 목표에서 한발씩 후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기후·환경 정책을 선도해온 EU의 ‘녹색 단일대오’가 중심을 잃고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극우 세력의 약진으로 유럽 정치 지형이 급변하면서 EU의 정책 우선순위가 환경에서 이민 문제로 옮겨가는 분위기다.

◇EU ‘산림훼손 수입품 금지법’ 수출국 반발에 시행 1년 연기…과도한 규제에 EU 내서도 반대 속출 = 지난 2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는 올해 12월 30일로 시행이 예정된 산림훼손 수입품 금지법(EUDR) 시행일을 1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EUDR은 축산업 등을 위해 산림을 농지로 전용한 지역에서 생산된 제품의 EU 역내 유통을 금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EUDR에 따르면 해당 제품을 EU 시장에 공급하거나 수출하려는 기업은 생산국·생산지의 지리적 위치, 인권·생산지 주민 권리보호 여부 등을 담은 실사 보고서를 관할 당국에 제출해야 하며,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제품은 EU 27개국 전역에서 판매가 금지된다. 적용 대상 제품군은 쇠고기, 코코아, 커피, 팜유, 대두, 목재, 고무 등이다. 특히 파생상품도 규제 대상이어서 타이어나 이를 사용하는 완성차 기업 등 한국 수출기업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으로 평가됐다.

EU가 EUDR 시행을 연기한 것은 각국 정부와 기업들의 강한 반발 및 로비 때문이다. 주요 수출국들은 입법 과정에서부터 EU가 사실상의 무역장벽을 세우는 것이라고 비판해왔다. 지난 6월에는 미 상무부가 명확한 이행 지침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행위에 시행 연기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EU 20개국도 모든 제품의 생산지 지리적 위치 추적 등이 무리라는 점을 들어 법안 연기를 요청했다.

◇농민 시위 기점으로 EU 녹색 단합 흔들…극우 득세로 환경은 뒷전 = EU의 핵심 녹색 법안 통과가 차질을 빚자 EU의 글로벌 기후 리더 입지도 타격을 받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EU는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획기적인 법안을 마련하며 기후 변화에 대한 세계적인 리더였다. 하지만 이제 세계는 반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U 환경해양수산장관을 지냈던 비르지니우스 신케비치우스 유럽의회 의원은 EUDR 시행 연기에 대해 “기후 변화와의 싸움에서 한 걸음 후퇴하는 것”이라며 매일 8만 에이커(324㎢·서울시 면적의 절반가량)의 산림이 위험에 처하고, 세계 탄소 배출량 15%를 증가시키며 궁극적으로 EU 기후 약속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손상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럽 국민들의 반녹색 여론이 각국 정부의 친환경 의지를 흔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발화점은 올 상반기 유럽을 뒤흔든 농민들의 트랙터 시위였다.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등에서 농민들은 올 초부터 EU의 환경규제와 농가 소득감소에 항의하며 트랙터를 끌고 거리를 점령했다. 당시 유럽의회 선거(6월)를 앞두고 번진 트랙터 시위에 집행위와 회원국들은 농가 직불금 수령을 위해 지키도록 한 휴경의무를 폐지하는 등 대책을 부랴부랴 내놨다. 또 집행위는 지난 4일 농업정책 기조를 규제·처벌 대신 인센티브 확대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밝혔다. 과도한 규제보다는 친환경 농업에 대한 보상을 확대해 농민들의 자발적 변화를 유도하겠다는 것으로, 유럽 농가 민심을 달래기 위해 한발 물러섰다는 평가다.

또 유럽 정치의 극우화로 정책적 우선순위가 환경에서 이민 문제로 뒤바뀌는 추세다. 환경 규제에 따른 피로감과 이민자 증가세 등 누적된 기존 체제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자국민 우선주의를 표방한 극우정당을 주류로 만든 것이다. 현재 EU 회원국 중 절반 이상인 15개국에서 극우정당이 이미 집권했거나 차기 집권 세력으로 유력시되고 있다. 지난 6월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의 경우, 강경 우파 및 극우정당이 차지한 의석수를 합치면 총 167석(총 720석 중 23.2%)으로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지지를 얻었다.

◇양대 리더인 독일 프랑스도 극우화에 진땀…유럽, 타협 실종되고 정책 추진력 상실 = 유럽의 맏형격인 독일과 프랑스도 극우 바람에 따라 정치지형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독일 극우 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AfD)은 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 시기 이후 처음으로 지방선거(튀링겐 주의회)에서 1위를 기록했고,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연합(RN)도 유럽의회 선거에서 프랑스 정당으로는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수십 년 동안 EU의 엔진 역할을 해온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의회 선거로 분열된 후 정치적 마비 상태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유럽 내 정치적 양극화는 정치 지도자들의 손을 묶어놓았고, 그들은 극단적 정당과 어렵게 연합을 해야만 통치가 가능해졌다. 각국 정부는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합의를 이루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독일 여론조사업체 포르자의 만프레드 귈너 대표는 “국정 마비는 오랫동안 스웨덴이나 네덜란드와 같은 작은 나라들에서 흔히 있었지만, 이제는 유럽 정치 체제의 구조적 특징이 됐다”며 “유럽 주요국은 항상 중앙 리더십을 둘러싼 대안과 명확한 다수파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듯한 다수파도, 단합된 힘도 없다. 전망이 밝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현욱 기자 dlgus3002@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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