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의 클래식感]가을부터 이어지는 ‘겨울 나그네’의 방랑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가 먼 길을 여행했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다. 31세라는 짧은 삶 속에서 그가 다닌 지역은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일대 및 그가 살았던 빈에서 가까운 슬로바키아 일부 정도다.
그렇지만 ‘방랑’은 그의 예술이 가진 핵심 키워드다. 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겨울 나그네’가 방랑하는 젊은이를 다뤘고, 가곡 ‘방랑자’는 같은 제목의 피아노 환상곡이 됐다. 가사가 있는 그의 곡만 방랑을 연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 ‘더 그레이트’는 네 악장 모두 저벅저벅 걷는 듯한 변화 없는 속도가 끝없는 여정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교향곡 8번 ‘미완성’의 첫 악장에 대해서도 ‘눈물지으며 달려가는 듯한’ 느낌을 얘기하는 이가 많다.
슈베르트와 거의 같은 시대에 역시 짧은 삶을 살았던 시인 빌헬름 뮐러(1794∼1827)는 사정이 달랐다. 그는 나폴레옹 전쟁에 프로이센 군인으로 참전해 여러 전투를 치렀으며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이탈리아를 여행한 뒤 로마 여행기를 남겼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가 선율을 만들 수 있다면 내 노래(시)는 훨씬 많은 즐거움을 줄 텐데. 기운을 내자! 이 시 뒤에 숨은 곡조를 듣고 이를 돌려줄 비슷한 영혼이 분명 있을 테니까.”
뮐러가 염두에 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가곡집 ‘겨울 나그네’가 된 시들을 아들 막스 뮐러(소설 ‘독일인의 사랑’ 작가)의 대부(代父)인 오페라 ‘마탄의 사수’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에게 헌정했던 것이다. 베버는 그 후 오래잖아 세상을 떠났고 뮐러가 소망한 ‘비슷한 영혼’은 그가 만나본 적 없는 슈베르트에게 돌아갔다. 뮐러도 슈베르트가 이 시들에 곡을 붙인 1827년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 가곡집의 선율들을 들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글도 가곡집 ‘겨울 나그네’의 공연 소식들을 전하기 위해 뮐러나 그의 주인공처럼 먼 길을 돌아왔다. 겨울 방랑자가 가을부터 곳곳의 공연장을 채운다. 25일 영국 테너 이언 보스트리지가 피아니스트 랄프 고토니와 함께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겨울 나그네’를 노래한다. ‘중부 유럽 여행’이 주제인 올해 서울국제음악제의 프로그램 중 하나다. 다음 날인 26일엔 독일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가 피아니스트 마리아 주앙 피르스와 경기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 무대에 이 곡을 올린다.
두 해외 명인의 무대 뒤에 국내 연주가들의 리사이틀이 따른다. 11월 1일 경기 안양 평촌아트홀에서는 베이스바리톤 한혜열과 피아니스트 윤호근이 ‘겨울 나그네’를 협연한다. 음악학자 김정미가 해설을 맡는다. 11월 28일엔 ‘고귀한 목소리’ 테너 김세일이 피아니스트 김수연과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같은 곡을 연주한다. 12월 17일에는 음악 칼럼니스트 유혁준이 해설하는 김세일의 ‘겨울 나그네’가 서울 강남구 포니정홀에서 열린다.
그러고 나서 달력은 실제 겨울로 접어든다. 12월 4일엔 서울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베이스 연광철이 피아니스트 박은식 반주로 ‘겨울 나그네’를 노래한다. 마포아트센터 M클래식축제의 M연가곡 시리즈 중 한 무대다. 올해 M클래식축제는 ‘보헤미아의 숲에서’가 주제다. 우연이지만 서울국제음악제의 주제 ‘중부 유럽 여행’과 결이 비슷하다. ‘보헤미안’은 예술혼을 지닌 방랑자의 상징이기도 하다.
흔히 보기 힘든 무대들도 마련된다. 12월 3일 대구 수성아트피아 소극장에서는 소프라노 김은형이 노래하는 ‘겨울 나그네’를 들을 수 있다. 이 곡 가사에는 주인공을 떠난 연인이 ‘그녀(sie)’로 표기되어 있으며 19세기에 여성 혼자 방랑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주로 남자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12월 13일에는 첼리스트 박유신이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피아니스트 플로리안 울리히 반주로 ‘가사 없는’ 겨울 나그네 전곡을 연주한다. 이 곡의 음반도 곧 발매 예정이며 리사이틀에선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전곡도 연주된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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