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탈분단, 통일 그리고 평화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뜬금없이 제기한 ‘통일 포기’ 평화론이 여야를 포함한 정치권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그의 ‘두 개의 국가론’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동의하기 어렵지만 별다른 고민 없는 통일론에 일침을 가한 것은 인정할 만하다. 여권에서는 진부한 색깔론을 제기하고 ‘반헌법적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그렇다면 헌법에 없는 내용을 가지고 개헌을 시도하는 것은 모두 ‘반헌법적’인가?
몇 가지 다시 짚어봐야 할 게 있다. 왜 통일해야 할까? 그동안의 모범 답안은 ‘한민족 한핏줄론’과 국력 확대였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같은 민족이라서 합쳐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는 설득력이 약하다. 무엇보다도 ‘한핏줄’론은 일단 과학적 근거가 없다. 한반도에 사는 주민들은 여러 종족, 부족의 후예이며 모두 ‘혼혈’이다. ‘순혈’은 존재하지 않으니 ‘혼혈’을 얘기하는 것 또한 모순이다. 여진, 거란, 말갈, 중국, 대만 심지어 일본이나 아라비아의 피도 섞여 있다.
물론 이산가족의 고통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두 국가가 적대적인 노선을 폐기하고 합의한다면 만남은 언제든 가능하다.
통일국가의 힘이 강해진다는 주장은 일리가 없지 않다. 경제력, 영토 크기, 군사력 등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힘만 세면 다인가? 남한의 군사력은 이미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간다. 힘을 강화하는 데 전력하다 보면 삶의 질과 민주주의는 되레 퇴행할 수 있다. 또한 독일의 경우만 봐도 ‘통일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많이 든다. 짧은 기간에 이뤄지는 통일은 사회문화적 통합이 아니라서 특정 지역 출신에 대한 차별과 소외를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남북이 ‘하나’가 되자는 통일론에 대한 집착은 근본적인 위험을 수반한다. 통일은, “민족도 하나, 국토도 하나, 제도도 하나, 생활도 하나로 되는 것”이라는 주장은 다원주의적 질서를 훼손하고 획일주의에 빠질 수 있다. 살기 좋은 세상이란 다양한 개성을 가진 개인과 공동체들이 서로 부딪치고 타협하면서 자신들의 욕망과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거라면 ‘One Korea’ 운동은 오히려 그것을 억압할 가능성도 있다. 하나가 되는 게 좋기만 할까?
통일을 통한 ‘민족 동질성’ 회복이라는 상투적 구호도 위험하다. 결국 과거의 전근대적 공통문화를 회복하자는 얘기니까. 가령 가부장적 문화와 소수자 차별 등을 그대로 두고 하나가 되자는 주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교류가 활발했을 때 북한을 다녀온 남성 지식인들이 거기서 만난 “때 묻지 않고” “순박한” 전통적인 여성들을 칭송하기에 바빴던 생각이 난다.
이런 이유로 오래전 조한혜정 교수 등이 중심이 되어 ‘남과 북: 문화통합’이라는 연구팀을 만들어서 이런 문제를 몇년에 걸쳐 토론한 적이 있다(나 역시 그 팀에 합류했었다). 그 성과물 중 하나가 <탈분단 시대를 열며-남과 북, 문화공존을 위한 모색>이었다. 이 책을 통해서 ‘One Korea’ 대신 ‘multicorea’라는 조어를 홈페이지 주소로 내세우며 다원주의적 통일론을 제기한 바 있다.
두 개의 국가론, 분단체제 현상 유지론이나 통일지상주의와는 다른 발상이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사용한 ‘탈분단’이라는 용어는 남북한의 영토 및 인구를 단순히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포괄하는 것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즉 분단체제로 인한 모순, 부자유와 차별, 기본적인 권리 억압 그리고 적대적 관계로 인한 만성적 안보 불안 등의 폐해를 넘어서야 한다는 요구를 함축한 개념이다. 평화 정착은 ‘탈분단’의 핵심일 것이다. 진보적 민족주의자로서 ‘분단체제’라는 개념을 정립한 고 강만길 교수의 다음 발언은 놀랍게도 ‘탈분단’과 거의 일치한다. “젊은 세대들에게 단군 자손이라는 이유로 통일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들이 앞으로 세계시민으로서 떳떳하게 평화롭게 살기 위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낫기 때문에 통일을 해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평화를 중심에 놓는다고 해서 통일을 포기해야 할까?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만약 ‘남한과 북조선’ 간에 평화가 정착된다면 곧 자연스럽게 남북은 하나의 정치적 사회적인 단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500년 후라면 몰라도 대략 50년 안에 이뤄지는 평화라면 남북이 유사한 기억의 인접 공동체로서 공존에서 바로 통일/통합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통일을 잊자”는 (이대근 칼럼니스트) 말에 동의한다. 다만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붙이기로 하자.
권혁범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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