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한강 노벨상이 알려주는 인문학 가치

강필희 기자 2024. 10. 1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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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라서 죄송’ 세태에 죽비…언어 장벽마저 무너져내려
인간 삶 본질 탐구하는 작업, 시대 국적 넘어 인류애 공유

1990년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필자가 신문사에 취직해 취재기자로 막 뛰기 시작할 무렵이다. 부산의 모 환경단체에 몸 담고 있던 사회학 박사 출신 활동가가 서로 친분이 좀 쌓이자 대뜸 물었다. “도대체 영문학은 뭘 배우는 학문입니까.” 타 전공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없지 않았으나 문학, 그 중에서도 남의 나라 문학을 공부하는 게 무슨 실용적인 효용이 있는가 라는 다소 도발적인 문제제기였다. 그때 나는 “그렇다면 사회학은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문송(문과라서 죄송) 세대’의 부질없는 논쟁이었다.

사실 학과 동기들은 학교를 다니는 내내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최루탄 가스가 옅어질 무렵 대학은 더 이상 진리의 상아탑이 아니라 취업의 전초기지로 변해가기 시작했기에 “이걸 배워서 뭐에 쓰나” 하는 의구심은 커져 갔다. 그나마 한국 사회에서 영어가 갖는 언어의 계급성 덕분에 영문학과는 좀 덜한 편이지만, 다른 어문계열이나 사회과학대 학생들은 소위 ‘돈 되는 학과’를 찾아 복수전공을 하기 바빴다. 그 와중에 취업특강 강사로 온 영문학과 선배의 말이 아직 기억 난다. “돌 틈에 핀 꽃을 보고 ‘참 아름답다’고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만으로도 영문학을 공부할 가치가 있지 않나.”

외국문학을 현지어로 공부하는 데는 적잖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언어와 인종을 넘나드는 인류 보편의 정서를 확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차별화되는 그 문화만의 특이성을 알아가는 재미에 빠지면 정수리를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깨달음 혹은 희열이 있다. 셰익스피어 희곡에는 인간 본성에 관한 통찰에다 독특한 유머코드가 숨어 있다. ‘밑에 있는 털이 코밑에 옮겨 붙으면 여자가 남자가 된다’는 식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한참 낄낄거렸다. 가족에게 외면당하는 아버지의 비참함은 100년 전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나 요즘이나 다를 게 없다.

만약 한국에서 노벨상이 나온다면 문학상은 제일 마지막이리라는 생각을 기자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어 특유의 글맛이 번역으로는 살지 않는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거기엔 ‘인문학 위기’가 당연시 되는 풍조도 큰 몫을 했다. 대학마다 어문학 계열 학과는 없어지거나 통폐합됐다. 부산에서 영문 일문 불문 등 전통적 인문학과로 이뤄진 단독 단과대가 존재하는 건 부산대가 유일하다. 외국어 능력자를 기르기 위한 외고 졸업생이 의대나 한의대에 진학하는 세상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2000년대 이후 인문학에 관한 학문적 무관심 이상으로 일반인의 주목도 역시 꾸준히 내리막을 걸었다. 성인 10명 중 6명이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나라가 한국이다. 한때 노벨문학상 못지 않게 인기를 누리던 이상문학상이나 동인문학상 수상작에 대한 관심은 예전만 못하다. 부산에선 동보서적 문우당서점이 문을 닫은 지 어언 20년이다. 동네서점 폐업은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아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활력을 찾지 못한다. 문해력은 ‘안중근 의사’의 ‘의사’가 항일운동가인지 의료인인지 구분 못하는 아이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기술과 실용학문 시대에 인문학의 길은 진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소설가 한강이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지난 10일 전까지는 그랬다.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놀라운 영화를 만날 수 있다.” 영화 ‘기생충’으로 세계 영화상을 휩쓴 봉준호 감독의 말이다. 장벽은 언어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은 음악에서 제일 먼저 깨졌고, 시각적 효과가 파괴력을 발하는 영화와 드라마가 그 다음이었으며, 끝까지 견고할 것 같았던 문학에서마저 한강의 노벨상 수상으로 마침내 무너졌다. 우리가 도스토옙스키나 마르케스의 소설을 읽으면서 시공을 초월하는 공감을 공유하듯 한강의 ‘소년이 온다’나 ‘채식주의자’를 통해 시대나 상황을 넘어서야 하는 인간의 조건을 세계인이 마주할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의 기념비적 의미를 새삼 곱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을 덧붙이고 싶다. 인간이 태어나 자라고 죽기까지 겪게 되는 고통과 갈등을 꾸역꾸역 버텨나가고, 위기와 기회의 순간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여러 선택과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힘이 인문학적 소양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여태까진 큰 소리로 외치지 못했다. 한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그게 가능해졌다.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문학의 소용을 전공자들만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이 경험했으면 한다. 요사이 가을 하늘이 워낙 맑아 도시 한복판인데도 새벽 별이 총총하다. 이 경이로움이 글로 변주될 때 한 개인 인식에 갇히지 않고 동시대 인류의 가슴에 박히는 별이 될 수 있다는, 인문학의 위대한 쓸모가 이제 시작됐다.

강필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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