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경쟁서 배제되는 ‘특권’ 누리는 그들, ‘계급장 떼고’ 눈가림 심사대 앞에 설 수 있나

기자 2024. 10. 14.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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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노벨 문학상 시대의 흑백요리사와 괴물미사일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열풍 이유
오로지 맛 ‘눈 가린’ 초유의 심사
여경래처럼 최고 위치서도 ‘경쟁’
공정·정의 화두인 사회에 ‘울림’
30대에 승진·능력 검증 안 된 총수
각종 의혹에 휩싸인 김건희 여사
현실선 경쟁 회피하는 최상위층
눈 가리고 심사했다면 어땠을까?
역사·지정학적 강제된 생존경쟁 오
랜 고통의 세월 끝 지금의 한국
‘그들’도 여경래·에드워드 리처럼
세계적 경쟁력을 갖춰야 할 때

넷플릭스의 요리경연 프로그램인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하 흑백요리사)>이 장안의 화제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8일 최종회차까지 공개되면서 한동안 그 열기는 계속 이어질 것 같다.

이미 수많은 요리경연 프로그램이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선보였었는데, <흑백요리사>가 지금 이렇게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례 없는 규모의 세트와 인원, 유명 요리사와 무명 요리사의 대결, 자기 분야 최고의 위치에 있으면서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두 심사위원, 심사위원을 심사해야 할 것 같은 경력의 요리사들의 경연 참여 등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요소가 많았다. 요리와 음식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도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은 오로지 맛으로만 평가하기 위해 안대로 눈을 가린 초유의 눈가림 심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특히 공정과 정의가 시대의 화두인 한국에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백수저 요리사와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동네 밥집의 흑수저 요리사들이 ‘계급장을 떼고’ 눈가림 심사 앞에서 평가받는 모습이 큰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목격하기 힘든 공정과 정의가 인위적으로라도 세상 어디에선가 구현되기를 갈망한다.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올해 한국프로야구는 세계 최초로 자동투구판정시스템(ABS)을 도입해 스트라이크와 볼을 판정했다.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으나 예년에 비해 볼 판정 시비가 크게 줄어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ABS는 투수들의 이름값을 따지지 않기 때문에 혹시나 있을지 모를 볼 판정의 편향성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흑백요리사>의 눈가림 심사 또한 그런 편향성을 줄이기 위한 놀라운 선택이었다. 그런 까닭에 판정의 결과에 해당 요리사들은 물론 전 세계 시청자들이 설득될 수밖에 없었다.

과학에는 안대나 ABS 같은 기계를 훌쩍 뛰어넘는 극강의 ‘눈가림 심판’이 있다. 바로 자연이다. 과학에서는 어떤 가설이든 이론이든 결국에는 궁극적으로 자연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이론이라도 실험결과와 맞지 않으면 폐기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과정에서 과학자의 이름값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자연은 가장 완벽한 눈가림 심판이다.

아인슈타인도 대자연의 눈가림 심판을 피하지 못했다. 영원불멸의 정적인 우주론을 추구했던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자신이 발견한 중력장 방정식에 임의로 새로운 항까지 추가했으며, 동적으로 변화하는 우주론을 주장한 다른 학자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그런 아인슈타인도 관측결과까지 경멸하지는 못했다. 1929년 허블이 팽창하는 우주를 발견한 이후로 아인슈타인의 우주론은 설 자리를 잃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인슈타인은 1935년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양자역학이 완전하지 않으며 아직 발견하지 못한 숨은 변수가 자연을 보다 완벽하게 기술할 것이라 주장했다. 이후의 수많은 실험들은 아인슈타인에게 ‘탈락’을 선고했다. 2022년 노벨 물리학상은 이와 관련된 공로자들에게 수여되었다. 과학이 이토록 성공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무자비하고도 가혹한 자연의 눈가림 심사 앞에 그 누구도 예외가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흑백요리사>가 내세운 ‘계급전쟁’이 한국 사회의 격렬한 경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흑백요리사>와 한국의 현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초경쟁사회라는 말이 무색하게 한국의 현실에서는 여경래처럼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경쟁을 하지 않는다. 현재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주요 재벌의 총수들은 대체로 창업주의 3, 4대 후손들이다. 이들은 과연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올랐을까? 한 조사(CEO스코어)에 따르면 총수 일가의 부모와 자녀가 함께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40개 대기업 그룹의 경우 평균적으로 총수 일가는 29세에 입사해 34세 전후에 임원으로 승진했다. 이는 보통의 상무직급 임원 평균 연령(53세)보다 19년 빠르다고 한다(‘세대교체’ 인사라며…속도 내는 재벌 세습경영, 민들레, 2023·12·3).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이들에게 국가경제를 좌우할 대기업의 경영을 맡기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한번 따져봐야 할 문제다.

누구나 선망하는 판검사나 의사는 어떨까? 법을 다루는 이분들에게는 누구보다 법 적용과 집행에 엄격해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작년에 법무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이전 10년 동안 판검사가 피의자로 입건된 사건 중 재판에 넘겨진 경우는 0.05%에 불과했다. 일반 국민이 기소된 확률이 30%대인 것과 크게 차이가 난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에 연루된 판사들은 대부분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사건을 불기소 처리한 사례에서 보듯이, 검사들은 권력을 향한 충성경쟁에 가장 열심이었다. 만약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여러 의혹들(주가조작이나 논문표절 등 혐의)을 두고 검사들이 눈가림 심사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던 30여년 전의 논리에서 한발도 나가지 못한 느낌이다.

의사들은 의대 정원을 계속 동결시켜 자신들의 기득권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다. 더 많은 의사배출로 더 많은 경쟁이 발생하는 것이 아마도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합리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갑작스럽게 의대 정원을 늘린 것은 문제이지만, 증원 불가라는 답을 미리 정해놓은 듯 예전부터 정부와의 대화에 소극적이거나 실력행사부터 들어가는 의사들의 행태를 납득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한국 같은 초경쟁 사회에서 최상위층이 오히려 경쟁에서 배제되는 특권을 누리는 모순은 우리의 전체 경쟁력을 좀먹는 원인이다. 최상위층이 회피한 경쟁은 결과적으로 중간층 이하의 사람들에게 몇배의 과중한 경쟁으로 떠넘겨지고 있다. 최상위 지도층은 앞장서서 솔선수범하고 그 결과에는 가장 무겁게 책임져야 한다. 그게 공정이다.

극심한 경쟁은 참가자들에게 상식을 뛰어넘는 선택을 강요하기도 한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말할 때의 “그렇게까지”가 사회적 통념상 어디까지 허용될 것인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흑백요리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백수저 요리사로 참가한 최현석이 단체전에서 요리 재료를 초반에 싹쓸이한 것이나 비상식적으로 높은 가격의 메뉴를 내놓은 것을 두고 시청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대단했다. 뛰어난 전략가라는 호평도 많지만 “굳이 그렇게까지?”라고 의문을 던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여기서 사고실험을 하나 해 보자. 만약 <흑백요리사>의 우승상금이 3억원이 아니라 300억원이라면 어땠을까? 또는, 경연의 결과가 <오징어게임>에서처럼 생사와 직결된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최현석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더 많아졌을 것이다. 이런 구도에서 보자면 <흑백요리사>와 <오징어게임> 사이에 묘한 연결고리가 생긴다. <오징어게임>에서는 성공에 대한 보상도 천문학적이지만 실패에 대한 대가도 치명적이다. 이런 극한의 설정 속에서 경쟁의 참가자들에게 “그렇게까지”의 한계는 어디일까?

방금 제기한 문제는 드라마나 예능 속에서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자주 마주친다. 경쟁 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생존경쟁이 국가 단위로 벌어지는 사태가 전쟁이다. 학생들에게 먼저 “인공지능을 탑재한 공격무기에게 교전권을 허용하는 것에 찬성하는가?”라고 물으면 경험적으로 80% 정도는 부정적으로 답한다. “만약 북한이나 중국이 교전권을 가진 인공지능 무기로 우리를 공격할 때에도 그 원칙을 지킬 것인가?”라고 재차 물으면 부정의 답변 비율은 크게 떨어진다.

넷플릭스의 또 다른 K드라마 역작인 <킹덤>에서 이와 비슷한 딜레마가 나온다. 임진왜란처럼 국가의 존속이 위태로운 전쟁 상황에서 좀비를 전장에 도입할 것인가의 문제가 그렇다. 드라마 속의 좀비는 현실에서 인공지능을 탑재한 무기, 또는 핵무기 같은 대량살상무기로 즉시 치환될 수 있다. 실제로 핵무기를 처음 개발했을 당시 미국에서도 비슷한 고민이 있었다. 전쟁을 당장 끝낼 수도 있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대량살상무기 사용 여부를 두고 미 군부에서도 찬반이 엇갈렸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조국이 그런 무기를 사용하는 첫 국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었다.

<흑백요리사> 8~10회가 공개된 지난 1일, 국군의날 기념 시가행진에서 현무5 미사일이 처음으로 전 세계에 공개되었다. 핵무기를 만들 수 없는 우리는 탄두중량만 8t에 이르는, 전 세계 무기사에 유례가 없는 재래식 ‘괴물미사일’을 탄생시켰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우리에게 강제된 지독한 생존경쟁이 말 그대로 ‘괴물’을 빚어낸 셈이다.

작년 3월 BTS의 리더 RM은 스페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왜 한국인들은 살인적인 경쟁 속에서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 적이 있었다. 유럽의 여타 제국주의 나라들과 달리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혹독하게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취지였다.

우리는 이렇게 살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투명한 환경 속에서 수천 년을 살았다. 그 오랜 고통의 세월 끝에 그나마 지금은 우리가 전 세계에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고발한 작가 한강은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괴물미사일’ 같은 미친 선택을 해야겠지만, 이제는 그런 선택을 강요하는 규칙 자체를 바꾸는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최상위 지도층이 그야말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그들도 <흑백요리사>의 여경래나 에드워드 리처럼 ‘계급장 떼고’ 눈가림 심사대 앞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이종필 교수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이종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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