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하루소식’이란 특별한 신문…“국정원도 열심히 봤다”

한겨레 2024. 10. 1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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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사랑방, 93년 팩스신문 창간
일간 인권신문 구상에 ‘그게 되겠어?’
무모한 도전 끝 12년6개월 발행 성취
3천호 발간 중 3분의1 ‘편집인’ 맡아
새벽마다 첫차로 출근해 작업
9시 출근시간 전에 예약발송 눌러
팩스신문에 인권 특종기사 ‘빼곡’
언론, 시민단체, 정보기관 모두 애독
팩스매체 당대 첨단기술 활용했지만
인터넷 시대 속보성 퇴색…2006년 종간

[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23화 ‘인권하루소식’ 12년

1995년 10월 ‘인권하루소식’ 박래군 편집장과 김정희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

지금도 내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에서 인권재단 사람, 4·16연대를 거쳐서 4·16재단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종종 잊는 것 같다. 그런 이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꼭 나오는 얘기가 있다. ‘인권하루소식’에 대한 기억이다. ‘인권하루소식’이 폐간된 게 2006년 2월인데도 사람들은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하면 팩스에 혓바닥을 길게 뺀 것처럼 흰 종이가 내려져 있었어. 사무실 출근하면 그것부터 찾아서 읽었어.”

내가 유가협 사무국장으로 있었던 1993년 8월에 창간 준비호를 내기 시작했고, 그해 9월7일에 창간한 팩스신문인 ‘인권하루소식’에 대한 기억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매일 신문을 내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게 되겠어? 시작은 하겠지만, 단체에서 매일 신문을 낸다고? 좀 있어 봐라, 두손 두발 다 들고 말걸”하고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매일 취재를 해서 그걸 기사로 만들고, 편집해서 발송한다는 게 말이 쉽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인권운동사랑방은 그걸 해냈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인 노태훈이 1993년 7월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때 팩스로 속보를 냈던 경험을 살린 것이었다. 신속하게 정보가 제공되는 게 여론 형성에 도움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그걸 인권신문으로 내자고 했다.

매일 신문을 낸다는 무모한 도전

‘인권하루소식’의 틀을 잡은 것은 염규홍이었다. 그가 ‘컴맹’이었던 심보선을 앉혀 놓고, 컴퓨터를 가르쳤다. 한글 워드 프로그램인 ‘ᄒᆞᆫ글’을 이용해서 편집 틀을 짰다. 맨 위에 박스를 만들어서 가운데에 신문 제호를 넣고 양옆으로는 발행인과 발행처와 호수와 날짜를 넣었다. 그리고 본문은 4단 편집이었다. A4 용지로 매일 2면 이상을 기사로 채웠다. 염규홍과 심보선은 아예 집에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하고, 편집하고, 그러다가 발송까지 했다. 그들의 잠자리는 주로 소파였다. 초대 편집장은 심보선이었고, 잠시 염규홍이 바통을 이어받았다가 내게로 넘어왔다.

1995년 1월부터 ‘인권하루소식’의 편집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김수경에게 편집인을 넘겨주었다가 다시 넘겨받고 하면서 ‘인권하루소식’ 12년 6개월의 기간에 3분의 1은 내가 편집인을 맡았다.

처음에 나는 두명의 활동가와 함께 신문을 만들었다. 오전 10시께 편집회의를 해서 취재할 기사를 배정하고, 가급적 퇴근 전까지 기사를 작성하게 했다. 그런데 한명은 대학교 시절에 학교 언론사에서도 일해 본 경험이 있어서 밤까지 기사를 작성했지만, 한명은 이런 데는 경험이 전혀 없어서 늘 헤매기 일쑤였다. 기사를 많이 손봐야 했다. 이들 외에도 여러명의 활동가들을 기자로 데리고 일을 했는데, 어떤 활동가는 조목조목 지적을 하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울었다. 나는 여러명을 울린 나쁜 편집인이었다.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를 검토하고, 수정하다 보면 어느새 전철 막차 시간이 다 되어버린다. 그러면 급하게 서울역으로 뛰어가서 집으로 가는 전철에 올라타야 했다.

그리고 새벽이면 거의 첫차를 타고 출근했다. 그럴 때 새벽인데도 아내가 도시락을 준비해주었다. 아내가 매일 새벽에 도시락을 싸준 게 지금도 너무 고맙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들어와서 급하게 편집을 한다. 편집하는 데 제일 애를 먹는 게 옆줄을 맞추는 일이었다. 줄 간격도 조정해보고, 글자 크기와 모양도 조정해보고 그러다가 겨우 대충 맞추어 놓고, 다음에는 기사 제목을 뽑아야 한다. 큰 제목과 소제목을 뽑는 일이 언제나 어려웠다. 그렇게 해서 어찌어찌 편집을 마친 다음에 프린터로 출력해서 팩스에 걸고 예약발송 버튼을 누른다. 대개 사무실에 출근하는 시간이 9시이니 그 시간 전에는 발송되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야 도시락을 까먹고 있으면 다른 활동가들이 출근을 했다.

팩스신문 ‘인권하루소식’에 실린 칼럼과 논평, 그리고 이동수 만화가의 만평을 묶어서 펴낸 책 ‘새벽을 깨우는 A4 한 장’.

‘인권하루소식’의 최고 애독자는?

당시에는 최첨단 매체였던 팩스신문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매일매일 내는 기사들이 모두 특종이었다. 언론들에서는 볼 수 없는 인권소식들로 가득 차 있으니 그런 평가가 지나치지 않았다. 언론사 기자들은 우리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취재를 해서 기사를 내보냈다. 어떤 때는 한겨레나 경향신문 같은 언론사에 전화를 해서 “오늘 나온 이 기사는 우리만 내기가 아까운데, 보충 취재해서 기사 좀 내보세요”하고 권유하기도 했다. 언론사에서는 우리 신문이 안 들어오면 반드시 전화해서 다시 보내달라고 했다.

언론사 기자들이 너무 사랑한 탓에 어떤 기자는 우리 기사를 그대로 베껴 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기사를 발견하고 항의전화를 하면 순순히 인정하고 수정하겠다고 사과했다. 그렇지만 어떤 기자들은 얼버무리고 무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언론사와 기자는 우리 발송처에서 삭제되었다.

그렇지만, 최고의 애독자는 단체의 활동가나 언론사 기자들이 아니었다.

“우리 회사에서는 매일 오는 하루소식(그들은 그렇게 불렀다)을 철해두고, 요약해서 윗선에 보고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최고의 애독자죠.”

이런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일까? 정보기관 소속의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국정원이 제일 열심히 볼 겁니다.”

경찰 정보관이 해준 말이었다. 우리는 발송처 중에 정보기관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번은 문화체육부에서 전화가 왔다. 주 5일을 발행하는 매체이니 일간지 등록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간지 등록 요건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윤전기를 소유하고 있거나, 윤전기를 임대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걸 위반하면 어마어마한 액수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고도 했다. 회의를 거쳐서 문화체육부의 권고를 거부하기로 했다. 노태훈이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다.

“팩스가 우리 신문 윤전기요. 신문사에서 쓰는 윤전기는 우리가 임대할 수도 없으니 맘대로 하쇼.”

그 뒤에도 여러번 전화가 왔었는데 종국에는 헌법소원을 내겠다고 한 다음부터 전화가 더는 오지 않았다. 인권운동사랑방의 불복종운동의 전통은 이렇게 시작된 것 같다.

2006년 2월28일 3000호를 끝으로 종간한 ‘인권하루소식’ 합쇄본.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그 시대의 인권상황판

‘인권하루소식’을 처음 발송하던 때의 얘기는 지금도 배꼽 빠질 정도로 웃긴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한명 보낸 다음에 한명 보내는 식으로 발송을 했다. 발송처가 수백 군데가 넘었는데, 그걸 일일이 하나하나 보내다 보니 하루 종일 발송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팩스 기계에 한 번에 스무 군데씩 발송할 수 있는 ‘동보기능’이 있다는 걸 알고 동보발송을 했고, 그다음에는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서 100명씩 그룹을 정해서 발송했다. 20명씩 동보발송을 하는 게 가능하다는 걸 알았을 때를 염규홍은 “혁명이었어”라고 기억한다.

매일매일 발송한 ‘인권하루소식’은 이후에 합본호로 묶어서 나중에 찾아볼 수 있게 했다. 창간 10년이 된 2003년에는 ‘인권하루소식’에 실린 칼럼과 논평, 그리고 이동수 만화가의 만평을 묶어서 ‘새벽을 깨우는 A4 한 장’ 이라는 책도 출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권하루소식’이 갖는 속보성은 인터넷 매체의 발전 등으로 인해서 퇴색해 가고 있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2000년대 초기부터 ‘인권하루소식’을 계속 발간할 것인가를 두고 오랜 논의를 거쳤다. 나는 가장 적극적인 폐지론자였다. ‘인권하루소식’의 역사적 소명은 끝났다, 활동가들이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

인권운동사랑방은 2006년 2월 ‘인권하루소식’은 종간하고, 주간 인터넷 매체 ‘인권오름’을 내기로 했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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