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돋보기] 복합 문화유산 공간, 나주 복암리 유적

2024. 10. 14.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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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홍 국립나주문화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

우리나라 4대 강 중 하나인 영산강은 일찍부터 고대인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돼 왔다. 이러한 영산강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을 꼽으라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나주 복암리 고분군을 들 수 있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은 1998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현재 행정구역상 나주 다시면 복암리 일대 너른 들판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고분군이 조성되던 당시에는 현재보다 해수면이 더 높았기 때문에 영산강과 훨씬 더 가깝게 위치하며 그 위용을 뽐냈을 것이다. 현재 이 고분군에는 4기의 봉긋한 고분이 자리하고 있는데, 구전으로 전해지는 칠조산(七造山) 즉 '7개의 산'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조성 당시에는 훨씬 더 많은 고분이 축조됐던 것으로 보여진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가장 규모가 큰 3호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1995년 기본적인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약 3년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학교 박물관이 공동으로 발굴조사했다. 그 결과 3호분에는 옹관묘, 목관묘, 석실묘, 석곽묘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 41기가 한 분구(墳丘)에 집중적으로 축조됐음이 밝혀졌다. 3호분은 3세기 중엽부터 7세기 초까지 조성됐고, 각 시기별로 분구를 수직·수평으로 확장하며 그 안에 각각의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모습은 영산강 유역만의 독특한 무덤 구조로 '아파트식 고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3호분에 만들어진 무덤 중 학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96석실'은 백제식 석실 내부에 대형 옹관 4기를 각각 배치해 옹관에서 백제식 석실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양상은 영산강 유역 고대 정치체가 백제로 편입돼가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 같은 복암리 고분군은 현재까지도 고대 영산강 유역 고분 문화 연구에 핵심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복암리 고분군 주변에는 본래 더 많은 고분이 축조됐을 것으로 추정됐기에, 2006년부터 그 주변부에 대한 조사가 국립나주문화유산연구소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주로 고분이 분포하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다양한 시대와 종류의 문화유산이 확인돼 이 일대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하고 있다. 우선 복암리 일대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은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주먹도끼다. 이 주먹도끼는 비록 지표수습 과정에서 확인됐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영산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고인류의 장구한 역사를 증빙한다. 그리고 청동기시대 집중적으로 축조된 지석묘가 다수 분포하고 있어 선사시대부터 이 일대가 인류의 삶의 터전이 돼 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원삼국시대에 해당하는 다중 환구(環球) 시설도 확인돼 주목된다. 이 환구 시설은 평면 타원형에 총 길이 약 150m, 너비 110m의 규모로 3-5중의 환구가 켜켜이 설치됐다. 일종의 구획 시설인 환구 내부 공간에서는 주거지 등 생활 시설이 확인되지 않아 방어를 주목적으로 하는 환호(環濠) 시설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또한 환구 내부 퇴적층 조사에서 소의 견갑골에 점을 친 복골(卜骨)과 함께 소형 토기들이 출토돼 제의 행위도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환구 시설에 대해서는 최근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된 성역 공간인 소도(蘇塗)라고 보는 견해도 제시돼 고대 사회의 일단면을 알 수 있는 중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복암리 일대에는 백제와 관련된 흔적들도 다수 확인됐다. 저장 용도로 추정되는 깊이 6m 규모의 대형 수혈에서는 고대 문서의 일종인 목간(木簡)이 다수 출토됐다. 이 목간에는 백제의 관직인 나솔(奈率), 덕솔(德率) 등이 표기돼 있거나 호구 변동 내역, 노동 월별 보고 등의 내용이 기록돼 백제에게 종속된 당시 복암리 일대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더불어 주변에서 출토된 백제 명문토기에 '두힐사'가 새겨져 있어, 복암리 일대가 백제 지방인 '두힐현'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의 흔적도 확인되는데 고려시대 나주시 다시면 일대의 지명인 회진현(會津縣)과 관련된 기와가 그것이다. 이 기와에는 회진현관초(會津縣官草)가 새겨져 있고, 더불어 관청으로 추정되는 건물지도 함께 확인돼 고려시대까지 복암리 일대가 주요 소재지로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든 흔적들은 놀랍게도 복암리 고분군 반경 500m 일대에서 모두 확인된다. 이는 복암리 일대가 단순한 고분 유적이 아닌 구석기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장기간 이어진 복합 유적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러한 복합 유적의 모습은 비단 복암리의 사례에 그치지 않고 다른 유적 주변에서도 다양한 시대의 문화유산이 존재 할 할 수 있음을 시시하기도 한다. 문화유산의 조사와 이해에 있어 한정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복암리 유적은 오늘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정대홍 국립나주문화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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