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병일 칼럼] `싸고 좋은 인프라` 시대의 종언
'싸고 좋은 인프라'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누군가의 노동을 갈아 넣으며 유지한, 달콤한 사회 인프라가 가능했던 시대가 20~30년 만에 종언을 고하고 있다.
'싸고 좋은' 상품이나 서비스? 그런 건 없다. 만일 지금 존재하고 있다면 누군가가 희생을 한 결과이다. 그러니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동안 '성장 대한민국'에 대한 믿음을 담보로 자신의 장밋빛 미래와 어느 정도의 사명감을 통해 기여 대비 낮은 보상을 받으며 묵묵히 일했던 일부 청년들. 그들이 이제 저출산·고령화와 저성장으로 한국의 미래가 밝지 않을 수 있다는 현실을 알아차리고 자괴감과 불신에 빠져있다. '지금 바로' 합리적인 보상을 지급하지 않는 현장을 이탈하고 있다. '워라벨'을 외치고 주 36시간 근무를 주장하는 이 시대에, 누가 이들을 비난할 수 있나.
우선 국방과 의료를 보자. 정상적인 국가에서 국방과 의료는 원래 대표적으로 돈이 많이 들어가는 사회 인프라이다. 그런데 그동안 초급장교와 부사관, 전공의(인턴·레지던트)라는 청년층 인력들을 갈아 넣으며 유지해 온 그 인프라가 청년들이 사직을 하면서 무너지고 있다.
현재 K9 등 육군 자주포는 조종수 부족으로 전쟁이 나도 30%는 사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국회 국정감사 자료에서 드러났다. 자주포를 몰아야 할 부사관과 장교가 부족하다는 의미다. 올해 1~9월 육군의 부사관 전역자는 임관자(하사)보다 많아 2.5배(전역 3170명 vs. 임관 1280명)에 달했다. 창군 이래 최대치다. 초급장교도 다르지 않다. 육군 학군장교(ROTC) 후보생의 인기가 급락해 인원 확보에 허덕이고 있고, '성골'이라는 사관학교 졸업생들도 장기복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임관 5년 차 중도전역 지원자 수가 올해 급증해 지난해에 비해 육사는 1.9배, 해사는 2.2배, 공사는 3.8배 늘어났다.
이유는 명확하다. 청년들의 자괴감, 현타, 불신이다. 병사들과는 달리 초급장교와 부사관은 복무 기간도 처우도 근무 여건도 제자리걸음이니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근무환경을 개선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막대한 돈이 든다.
의료 분야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대학병원은 인턴, 레지던트들이 주 100~120시간 근무하고 36시간 연속근무를 밥 먹듯 하며 시간당 1만원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받는, 그야말로 몸을 갈아 넣는 것을 '연료'로 유지되어왔다. 이를 통해 국민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싼 가격으로 빠르고 품질 좋은 치료를 받아왔다.
이들도 건보재정 고갈 전망으로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필수의료 패키지 정책 발표와 의대정원 증원으로 향후의 보상 전망이 어두워지자 사표를 내는 선택을 했다. 지금 당장 취업하거나 개원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라도 다시 전문의 수련을 받도록 하려면 근무시간을 주 50시간 정도로 줄이고 36시간 연속근무라는 살인적인 환경을 없애는 등 여건을 직장인 수준으로 개선해줘야 하는데, 역시 막대한 돈이 든다.
'싸고 좋은' 전기, 지하철, 가스 등 공공서비스는 인기영합적인 요금 정책으로 지속가능성에 불신이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전력은 올해 6월 말 기준으로 연결 총부채가 무려 202조9900억원에 달한다. 원가에도 못 미치는 요금을 받아 적자가 쌓이고 있음에도 올해 4분기 전기요금은 또 올리지 않았다. 당장 싼 요금으로 편하게 살자고 젊은층과 미래 세대의 돈을 빼앗아 쓰는 셈이다.
필자는 올해 초 본보 '출생 급감시대, '인력정책 대긴축' 나서야'라는 칼럼에서 의대정원 증원이 아닌 인력정책 대긴축을 주장했다.
국방은 첨단무기와 AI로 병력 효율성을 제고시키면서 인구 감소에 대응하고, 부사관과 청년장교의 근무여건을 소수정예로 상향 조정해야 한다. 의료도 AI와 기술을 활용해 의사의 생산성을 높이면서 인력은 긴축하고, 의료비 인상을 통해 의료 수요를 줄이며 인턴 레지던트의 근무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전기 가스 등 공공서비스도 원가를 반영한 요금을 받아 한국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줘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청년들이 자괴감이나 불신이 아닌 자부심을 갖고 국방 의료 등 사회의 기간(基幹) 분야로 돌아올 것이다. 이제 '싸고 좋은' 사회 인프라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진실을 인정하자. 적정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불가피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인프라 붕괴는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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