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뉴욕의 감각

노자운 기자 2024. 10. 14. 15:2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뉴욕의 감각

작년 이맘때,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보기 드문 진풍경이 벌어졌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화백 한 명이 전시실 바닥에 맨발로 쪼그려 앉더니, 좌우로 붓질을 하며 느린 걸음을 걸어나갔다. 화백은 멈추지 않고 선을 그렸지만 역설적이게도 선은 그의 발자국에 의해 지워졌다. ‘그리고’ ‘지우는’ 상반된 행위가 공존하며 만들어낸 궤적은 10m 길이의 붉은 목판을 가로질렀고, 행위가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퍼포먼스의 주인공은 1970년대 한국의 아방가르드(전위) 예술을 이끌었던 이건용(82) 작가. 그의 대표적인 행위 예술 ‘달팽이 걸음’이 44년 만에 재현된 순간이었다. 한국 미술계는 일제히 열광했고, 누군가는 “감동에 가슴이 벅찼다”고 했다. 노화백의 퍼포먼스는 어째서 그토록 열광적 호응을 받았을까.

구겐하임이 어떤 곳인가. 2019년 무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세계 최고의 현대미술관 중 하나이자 후기인상주의 거장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등 인류 미술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거장들의 그림이 대거 소장된 곳이다. 바실리 칸딘스키의 그림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장 중이다. ‘뉴욕의 메디치’라고 불리는 구겐하임 가문이 세계 미술 심장부인 뉴욕에 세운 예술의 보고다. 그런 구겐하임에서 한국 작가가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찬사를 받았다는 건, 한국 미술이 더 이상 변방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예술계에서 구겐하임, 나아가 뉴욕이 상징하는 바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현재 세계에서 그림 값이 가장 비싼 작가 중 한 사람인 장 미셸 바스키아도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예술혼을 불태우다 뉴욕에서 죽었다. 바스키아는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뉴욕은 어떻게 세계 미술의 수도가 될 수 있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예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온 배경을 정치·경제학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우세하나, 오늘날 뉴욕 전반을 지배하는 감각, ‘뉴욕다운’ 정서가 없다면 왕좌를 지킬 수 있었으리라 장담하기 어렵다.

국내 3대 갤러리인 가나아트갤러리의 박주희 디렉터는 ‘뉴욕의 숨은 감각’을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 노력의 흔적이 저서 ‘뉴욕의 감각’에 오롯이 담겨 있다. 박 디렉터는 ‘남쪽의 청와대’로 불리는 청남대 미술관에서도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며, 국민대 디자인대학원 겸임교수를 거쳐 올해부터 동국대 교양대학에서 미술사를 가르치고 있다.

‘뉴욕의 감각’은 저자가 10년 간 뉴욕에 거주하며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빼곡이 담아낸 책이다. 그는 “뉴욕은 물리적 공간 그 이상으로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 숨쉰다”며 “그래서 뉴욕만의 감각을 전하는 일은 잠깐의 대화나 짧은 글로 전달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이렇게 책을 빌려 뉴욕이라는 도시를 온전하게 담아내고 싶었다”고 한다.

1장 ‘공간, 사람을 끌어당기는 중력’은 뉴욕의 풍경을 만드는 장소와 브랜드들을 다뤘다. 자본가의 컬렉션이 그대로 박물관이 된 ‘모건 라이브러리 앤 뮤지엄’, 세계적인 팝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의 ‘러브(LOVE)’ 조형물 등을 소개한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선봉에 선 미국에서만 가질 수 있는, 돈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는 뉴욕의 풍경”이라고 썼다.

2장 ‘예술,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아름다움’에서는 뉴욕에 자리한 세계적인 미술관과 박물관을 둘러본다. 3장 ‘문화, 다채로운 이야기 가득한 뉴요커의 일상’에서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며,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뉴욕을 만들어가는지 살펴본다. 평범한 시민들의 기부 문화로 유지해나가는 센트럴 파크, 농부들과 농산물을 직거래하는 ‘유니언스퀘어 파머스 마켓’ 등의 이야기를 통해 뉴요커가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읽을 수 있다.

마지막 4장 ‘맛, 마음까지 열고 닫는 음식의 힘’에서는 뉴욕에서만 맛볼 수 있는 ‘피터 루거 스테이크’나 ‘주니어스 치즈 케이크’부터 이국적 음식을 만드는 중국 요릿집 ‘조스 상하이’, 이탈리안 레스토랑 ‘밥보’ 등을 소개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 데 모여 다채로운 음식을 만들어 먹는 도시인 만큼, 새로운 문화와 감각이 발달하기 좋은 여건이 형성돼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박주희 지음ㅣ다산북스ㅣ343쪽ㅣ2만2000원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