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보기] 하나의 민족이라는 상상, 두 개의 국가라는 현실
두 국가론이 남북 관계의 현안이 됐다. 올해 1월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0차 회의에서 김정은 체제는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 통일을 실현한다'는 북한 헌법 9조를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이달 개최된 제14기 11차 최고인민회의에서 실제 통일조항이 개헌됐는지 아직 확인되진 않았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은 이미 개헌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발신했다. 통일에 대한 '김정은 주의'는 이미 2021년 제8차 노동당 대회에서도 확인됐다. 노동당 규약전문의 '민족해방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문구가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발전 실현'으로 변경된 것이다. 혁명전략 문구의 변경 의도가 무엇인지 상반된 해석이 존재한다. 김정은 체제가 두 국가체제를 선언한 것이라는 해석과 함께 대남혁명전략에는 변화가 없다는 시각이다.
최소한 김정은 체제의 개헌 의지가 사실이라면 그 정치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통일은 남북 모두에게 적대적 체제경쟁의 목적이자 명분이 돼왔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엔 동시 가입 제의(6·23선언)에 북한이 극구 반대한 것은 분단을 고착화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1991년 9월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으로 '두 개의 코리아'가 현실이 됐지만, 같은 해 12월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 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했다. 그런데 김정은 체제가 돌연 선대의 유훈이자 군사적 목표인 통일전략의 폐기를 먼저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상상이 적대적 정치와 군비경쟁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닌지 양안 관계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볼 필요가 있다.
두 개의 차이나 역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가 남긴 갈등과 모순의 유산이다. '치욕의 역사'인 홍콩, 마카오, 대만을 '하나의 중국'으로 통일하는 것은 1949년 건국 이후 중국공산당의 최우선 과제였다. 중국은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중국 특색의 통일전략을 통해 1997년과 1999년 반환된 홍콩과 마카오를 통합했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정체성을 계승하여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온 대만통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1992년 합의된 '92 공식'은 적대적인 양안 관계가 진전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일중각표(一中各表)'라는 92 공식의 모호성을 대변하듯 경제적 협력과 정치적 통일의 모순과 갈등은 평행선을 달려왔다. 부상 이후 중국 문제가 본격화된 시진핑 체제 이후 양안 갈등은 더욱 심화했다. 하나의 중국은 곧 '중국의 꿈'을 성취하는 목표의 하나로 강조됐고, 2022년 3연임 이후에는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군사적 능력과 의지를 과시했다.
우월한 힘을 가진 중국의 일방적 강압은 통일목표를 진전시켰을까. 민족과 역사를 공유할 뿐,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는 중국의 통일전략은 대만에는 위협과 다름없다. 대만 정치대의 정체성 조사에 따르면 1992년 본인의 정체성을 중국인이자 대만인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46.4%였지만 2024년 30.4%로 하락했다. 반면 대만인이라고만 응답한 비율은 17.6%에서 64.3%로 세 배 이상 증가했다. 민족이라는 상상이 이질적 체제에서 형성된 정치적 정체성보다 우선될 수 없다. 시진핑 체제의 강압적인 통일 공세는 동북아의 안보 현안이기도 하다. 2023년 8월 한미일은 '대만조항'을 공동성명에 포함했다. 중국의 일방주의를 억지하기 위해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안보협력, 인태전략, 오커스에 더해 나토도 인태지역에 대한 관여를 확대하고 있다. 역사와 민족을 위한다는 중국의 통일전략이 오히려 양안 관계는 물론, 지역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서로를 주적으로 규정한 남북이 민족의 통일을 주창하는 모순은 양안 관계와 다르지 않다. 남북 관계가 한반도와 지역 평화의 전제조건인 것은 분명하지만, 통일이 평화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현실도 분명하다. 민족이라는 상상이 아닌 평화를 우선하는 남북 관계의 정치적 과제는 무엇인지, 김정은이 쏘아 올린 두 국가의 화두를 숙고할 시간이 됐다. 민족의 이름으로 비극을 무릅쓴다면 그야말로 민족의 적이 아닌가. 윤대엽 대전대 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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