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막’ 지역 노인들 “면허 반납하면 생계 막막”

양구=이소정 기자 2024. 10. 1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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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 위해 운전대 놓을수가 없어”
교통여건 열악… 반납률 1% 안팎



“‘교통 사막’인 우리 동네에서 면허 반납하잖아? 그럼 무면허로 운전하고 다닐 수밖에 없어. 여기선 살기 위해 운전해야 돼.”

6일 강원 양구군 해안면 만대리에서 만난 김기성 씨(63)는 “남한테 민폐 끼치기 전에 면허를 반납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30년 넘게 감자 농사를 짓고 있다는 그는 “면허가 없으면 생업을 이어갈 수 없다”고 토로했다.

내년이면 국민 5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 가운데 고령자 운전 사고는 최근 3년 새 30% 가까이 급증하는 추세다. 이에 대응해 전국 지방자치단체 243곳 중 220곳에서 면허를 포기하면 일정 수준 보조금을 주는 ‘고령자 운전면허 자진 반납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반납률은 1%대에 그치고 있다.

13일 경찰청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조승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운전면허 반납자는 총 11만2896명으로, 반납률 2.4%로 집계됐다. 올 들어 8월까지 반납률은 1.2%로 반 토막 났다. 특히 고령 운전자 비중이 높고 교통 여건은 열악한 충북(0.8%)과 충남(0.9%), 강원, 경북(이상 1.0%) 등은 반납률이 더 낮았다.

윤환기 한국도로교통공단 충북도지부 교수는 “지방 고령자들의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작정 운전면허 자진 반납을 독려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지역 내 콜버스와 같은 수요응답형 교통체계(DRT) 등 다양한 형태의 교통수단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읍내 가는 버스 3시간에 1대… 운전면허 없인 장보기도 힘들어”



[도로에 드리워진 ‘고령사회 그늘’]
〈上〉 시골 ‘교통사막’ 면허반납 저조
시내버스 오전 2대, 오후 2대… 언제올지 몰라 마냥 기다려
일하는 노인들 갈수록 증가… “농어촌 교통 개선 선행돼야”


6일 오후 강원 양구군 해안면 만대리의 정류장에서 장성봉 씨가 인근 하나로마트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만대리에서 차로 5분, 걸어서 42분 거리에 있는 마트까지 가는 버스는 이날 단 4대뿐이었다. 양구=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몇 달 전 아버지께서 98세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세상 떠나시기 서너 달 전까지도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자식들이 위험하다고 만류해도 늘 ‘너희가 매번 운전해 줄 거 아니면 조용히 하라’며 나무라셨다.”

강원 양구군 해안면 만대리에 사는 장성봉 씨(63)는 이같이 말하며 6일 동아일보 취재팀과 함께 ‘차 없는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개인 소유 차량 없이 이른바 ‘교통 사막’에서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도록 해준다는 취지였다. 장 씨는 돌아가신 부친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촌에선 운전면허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수차례 단언했다.

● 읍내 가는 버스 하루 4대뿐… 놓치면 하 세월

이날 장 씨는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저녁 장을 보기 위해 자택 인근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장 씨의 자택 인근에는 편의점, 마트 등 도보권의 편의시설이 전혀 없었다. 가장 가까운 하나로마트까지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걸어서 가면 40분 넘게 걸린다고 했다.

주말인 이날 해안면을 운행하는 시내버스는 하루 4대뿐이었다. 출발지인 양구 읍내를 기준으로 오전 6시 40분, 9시 50분, 오후 2시 30분, 6시 10분에 버스가 있었다. 장 씨는 이날 오후 2시 50분 무렵부터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다가 오후 3시 10분경에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 배차 간격이 길고 모바일 앱이나 온라인 등을 통해서도 예상 도착 정보를 확인할 수 없어 일찌감치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버스로 10여 분을 달려 마트 근처 정류장에서 내린 장 씨는 마트에서 떡볶이, 닭발, 냉면 육수 등 저녁으로 먹을 음식들을 산 뒤 재빨리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종착지에서 회차한 버스를 다시 타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정류장을 떠난 뒤였다. 장 씨는 “다음 버스는 오후 7시에나 온다”며 “가까운 거리라 택시도 잘 잡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동네 사람 차를 얻어 타거나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며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이날 동네 사람도 만나지 못한 장 씨는 결국 취재팀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 일하는 노인 느는데… “대체 교통수단 늘려야”

장 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통연구원이 2022년 발표한 ‘생활서비스 시설 교통접근성 진단’에 따르면 전국 6개 권역 중 수도권(17.30분)을 제외한 5개 권역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25분 이내에 종합병원, 판매시설에 가지 못한다. 강원권(45.50분), 호남권(41.95분), 충청권(39.30분), 제주권(29.25분), 영남권(28.60분) 순으로 이동 시간이 긴 것으로 파악됐다. 강원 지역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마트에 가려면 수도권 대비 2.6배나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한다는 의미다.

반면 서울 등 대중교통 인프라가 발달한 대도시는 상대적으로 운전면허를 반납하는 데 부담이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올해 5월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한 박영춘 씨(76)는 매일 아침 편도 12km 거리를 지하철로 25분 만에 다니며 시니어클럽 노인 일자리 활동을 하고 있다. 박 씨는 “나이가 드니 순발력도 떨어지고 복잡한 길이 나오면 걱정돼서 반납했다”며 “지하철과 버스가 워낙 잘돼 있고 급하면 택시도 많이 다니니 자동차세 내고 차량 수리하고 하느니 이게 더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일하는 노인’이 늘면서 고령층이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많은 것도 면허 반납의 걸림돌이다. 경북 안동시에서 30년 가까이 개인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는 최상기 씨(75)는 “건강이 안 좋아지면 그땐 면허를 반납할 생각이 있지만 아직 신체 능력이 많이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집에만 있느니 돈도 벌고 몸도 움직일 겸 당분간은 계속 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운전 졸업증’ 등의 정책을 통해 면허 반납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한편 대체 이동수단을 다양화하는 등 농촌·시골 지역의 교통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상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교통학 전공)는 “일본의 경우 면허 반납 고령자에게 운전 졸업장을 주고 있다”며 “우선적으로 교통 사막 지대를 해소하고, 면허 반납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덜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QR코드를 스캔하시면 ‘교통 사막’ 실태를 전하는 강원 양구군 주민들의 인터뷰 영상으로 연결됩니다.



양구=이소정 기자 sojee@donga.com
김민지 인턴 기자 서강대 철학과 수료
조승연 인턴 기자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졸업
영상·사진 양구=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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