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희 칼럼] 의사만 부족한 게 아니다

강경희 기자 2024. 10. 14.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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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5년 의사 1만명 부족’ 논리
언제까지 반복할 건가
과학기술 분야 인재 부족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
AI·반도체·우주항공·바이오 육성 약속
그 소는 누가 다 키우나

지난해 고용노동부는 인공지능(AI)·빅데이터·클라우드·나노 등 4대 신기술 분야의 인력 수급 전망을 발표했다. 오는 2027년까지 6만명이 부족할 것이라고 한다. AI 분야에서 초·중급 인력은 수요(4만4600명)보다 3800명 더 공급되지만 R&D(연구개발)에 투입할 고급 인력은 수요(2만1500명)의 23%만 배출돼 1만6600명이 부족하다. 빅데이터 분야 고급 인력 역시 3만명 필요에 20%(6100명)만 배출된다. 클라우드 분야에서도 고급 인력이 1만500명 부족하고, 나노는 초·중·고급 인력이 다 부족해 도합 8400명 모자란다.

반도체 분야도 심각하다. 오는 2031년 5만4000명 부족할 것이라고 한다. 숫자도 문제지만 석사 이상 인재를 얼마나 확충할 수 있을지가 난제다. 반도체 분야 취업자의 66%가 2년제 전문대학 졸업자이고 23%가 4년제 대학 졸업자다. 반도체 공정의 실무자 양성이 주를 이뤄 석사 이상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 인구의 절반도 안 되는 대만은 매년 반도체 인재를 1만명씩 배출하려고 총력전을 편다. 미국·중국·일본 등이 반도체 자립에 나서면서 가뜩이나 부족한 우리나라 반도체 고급 인력은 ‘영입 1순위’ 대상이다.

한 나라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인력은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인재들이다. STEM 인재는 의사 양성 이상으로 시간이 걸리고 역량도 요구된다. 인구 팽창기라면 의사도, 과학자도, 엔지니어도 다 늘릴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다. 대학 입학하는 18세 학령 인구가 1990년 92만명에서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앞으로 더 줄어든다. 고령화로 의사 부족을 예상하는데 의사만 부족한 게 아니다. 국력과 국부를 책임질 과학기술자 부족은 훨씬 심각하다.

정부 역할은 나라 전체, 그리고 국가 미래를 넓게, 멀리 보면서 인재의 효율적 양성과 재배치가 이뤄지도록 인센티브도 제공하고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부는 2035년에 의사 1만여 명이 부족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토대로 의대 정원을 매년 2000명씩 5년간 늘리겠다고 올 2월 발표했다. 지난해 서울대 공학·자연과학 계열 입학 정원이 1795명이고, 4대 과학기술원의 입학 정원을 다 합쳐 2000명이 안된다. 의사 부족 보고서를 작성한 연구자조차 점진적 증원을 제안했다는데 정부는 ‘연 2000명 증원’을 강행했다. 최종적으로는 정원의 50%가 늘어나는 1509명 증원 입시안을 확정했다. 그동안 의료 개혁에서 의사들이 과도한 집단 이기주의를 보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의사들과의 힘겨루기에 매달리기보다 정부가 훨씬 귀담아들었어야 할 지적이 ‘입시 블랙홀’ 의대의 급격한 증원이 이공계 인재 양성에 미칠 쇼크였다.

이공계는 안팎으로 힘들다. 의대에 인재 뺏기고, 기껏 키우면 해외에도 뺏긴다. 카이스트를 비롯한 4대 과학기술원에 진학한 과학고·영재학교 출신조차 매년 200명꼴로 의대 진학을 위해 중도에 그만둔다. 해외 유출도 심각해 10년간 해외로 떠난 이공계 학생이 34만명이 넘는다.

의대 증원 사태가 8개월 지나면서 파장만 확산된다. 서울대 휴학생이 급증해 예년의 2~3배 수준이다. 공대와 자연과학대 넷 중 하나가 휴학 중이다. 전공의 공백을 메우느라 대학병원 의사들은 탈진 상태다. 전국 의대생의 군 휴학이 예년보다 7~9배 늘었다. 각각 38·37개월 복무하는 군의관·공보의 대신 18개월 현역 입대가 대폭 늘어 군의관·공보의도 줄게 생겼다.

윤석열 대통령은 반도체, AI, 우주항공, 바이오 등 첨단 산업 육성을 특히 강조했다. 그런데 거창한 비전과 달리 막상 현실 정책은 이공계에 치명타를 가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작년에는 R&D 예산을 대폭 삭감했고, 올해는 ‘대입 블랙홀’ 의대 문을 활짝 열었다. 지난해 ‘한국판 보스턴 클러스터’를 육성해 바이오 산업을 키우고 세계적인 의사과학자도 양성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의대 정원을 1500명 넘게 늘리면서 의사과학자 몫은 전혀 배정 안 했다. 카이스트와 포스텍이 추진하던 과기의전원은 요원하고, 의사과학자를 적극 배출해야 할 상위권 의대 정원은 전혀 늘리지 않았다.

개인 차원에서 이공계 대신 의대로 가는 건 직업의 안정성, 수입 등을 따지는 합리적 선택이다. 하지만 개개인 선택의 합이 사회 전체적으로 늘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 건 아니다. 보상 체계가 왜곡된 상태에서는 이공계 대신 의대, 의대 내에서도 필수 의료 대신 덜 위험하고 손쉽게 돈 버는 쪽으로 쏠린다. 왜곡된 보상 체계를 시정하고 인재가 시급한 곳에 강한 당근책을 제시해 인력 배치의 물길을 나라 전체에 도움 되게 바꿔나가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잘못 채운 첫 단추 ‘2000명 증원’을 방어하려다 보니 정부 당국자의 말이 꼬여 간다. “휴학은 개인의 권리가 아냐” “의대 교육과정 6년을 5년으로 단축” “원래 4000명 증원해야 하는데 2000명은 최소”라는 장관과 대통령실 수석의 잇단 망언을 듣자니 냉수 먹고 체한 심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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