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뼈'와 '눈 한 송이'···한강의 문학은 어떻게 우리를 지켜내는가[한강, 노벨 문학상]
5·18의 쇠·피가 교차하는 폭력에서 인간의 뼈들이 부서져 버린 자리를 잔혹하게 응시하는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4·3으로 떠나보낸 존재들을 삶으로 끌어당기는 불가능한 기획을 시도
살육의 역사 속 깨끗한 흰빛을 향해 솟구쳐오르는 그의 소설을 두고 ‘흰 뼈의 미학’이라 명명하고 싶다
한강의 소설은 약하고 연한 살성과 물질인 뼈로 이루어진 인간이 어떤 존재일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다. 한강의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린 단편 ‘아홉 개의 이야기’는 흡사 아홉 편의 쓸쓸한 연애시를 모아놓은 듯한 작품이다. 이 중 하나인 ‘어깨뼈’에서는 사람 몸의 가장 정신적인 곳이 바로 어깨라고 말한다. 처음으로 나란히 걸을 때 길이 갑자기 좁아지면서 당신과 나의 마른 어깨가 부딪친 순간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한다.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風磬 소리를 낸 순간.”
살아 있는 존재들의 뼈는 부딪치며 이렇게 맑은 소리를 낸다. 그러나 훼손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에게서 우리가 흰 뼈를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뼈는 인간 역시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언젠가 죽음이라는 물질의 세계로 반납될 것을 알리는 지극히 건조한 증표이기도 하다. 5·18민주화항쟁을 다룬 <소년이 온다>(2014)와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2021)는 모두 참혹한 비극을 다루지만 그사이에 흐른 7년의 시간은 작가로 하여금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게 만들었다.
이 중 먼저 들여다보려 하는 것은 쇠와 피가 교차하는 폭력에서 인간의 뼈들이 부서져버린 자리를 보다 잔혹하게 응시하는 <소년이 온다>이다. 소설은 “비가 올 것 같아”라는 ‘동호’의 중얼거림으로 시작된다. 비의 기미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이 소년은 지금 1980년 5월 광주 상무관에서 합동추도식을 치르지 못한 시체들을 지키는 중이다. 초를 아무리 태워도 수없이 많은 시체들의 시취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아직 중학생에 불과한 이 소년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가. 광장에서 친구가 옆구리를 총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을 목격했지만 주위의 만류와 자신의 두려움으로 달려가지 못했고, 그 죄책감으로 지금 동호는 무명천을 쓰고 누워 있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 사이를 서성인다. 여린 소년이 지나치게 떠안고 있는 죄책감은 그를 그날 저녁 도청에 남도록 했다. 2장 ‘검은 숨’의 끝에서 동호의 죽음이 암시된 이후, 에필로그까지 모든 장은 그 시절 광주를 통과해 살아남은 이들에게 선연하게 남은 상처와 애도될 수 없는 슬픔으로 채워진다.
그러니 이 소설을 두고 한강의 소설 중 가장 힘겹게 읽어낼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동호가 죽음을 목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 없이도 껴안고 있던 죄책감은 이후에 광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또 이를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이되어 날카로운 고통으로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이라는 문장에 스며 있는 살아남은 자의 수치심은 인간을 짐승 쪽으로 자꾸만 끌어내리는 육체와 투쟁하며 나온 말이다. 고문 속에서 차갑고 공허한 짐승의 눈을 갖게 되는 인간, 죽고 나면 고깃덩어리처럼 썩어가는 인간,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매일 밤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는 인간의 형상들을 그리다 소설은 묻는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러니 소설에는 초연한 확신이나 막연한 낙관이 자리할 틈새가 없다.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계속 밀고 나간 자리에 우리는 처음 보는 기이한 장례식을 마주한다. 그것은 검열로 대사가 모두 삭제된 5월 광주의 비극을 상기시키는 연극의 한 장면이다. 배우들은 목마른 물고기처럼 쉴 새 없이 입술만을 달싹이지만, 신음과 체머리를 뚫고 입술 모양으로 전달되는 대사들이 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정상적인 의례로 떠나보낼 수 없을 때, 삶은 어떻게 변하는가. 소설 중반부에 자리한 이 침묵의 연극을 상연하기 위해, 그래서 어떻게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소년이 온다>라는 장편 전체가 쓰여야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해왔다. 극이 진행되는 가운데 객석 사이로 나타나 해골의 머리를 끌어안고 무대를 향해 걷는 어린 소년은 동호처럼 보인다. 하지만 끔찍한 학살이 일어난 광주를 겪어왔고, 또 소설로 뒤늦게 알게 된 모든 이의 초상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초인적인 한 영웅이 아니라 소심한 마음과 나약한 육체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떨리는 눈으로도 끝까지 응시하는 눈이 있고, 본능을 거슬러서 싸우기로 결단하고 끝내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는 강렬한 의지가 있다. 이 잔인한 역사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두고 한강은 희생자라 말하는 대신, 고결한 영혼들이 거기에 있었다고 말한다. 소설의 마지막, 한겨울의 망월동 묘역에서 한 인물이 초를 켰을 때, “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는 영혼의 파수꾼이 된 작가가 애도를 멈추지 않으며 힘겹게 살려낸 영혼처럼 보인다.
<소년이 온다>가 연약한 인간이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지를 드러내며 애도하고 있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삶으로 끌어당기는 불가능한 기획을 시도한다. 소설가인 주인공 ‘경하’는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한 친구 ‘인선’의 부탁으로 그가 키우던 새를 살리기 위해 제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주 4·3과 얽힌 인선의 가족사를 접하게 된다. 작가가 이 역사적 소재를 선택한 순간, 소설 아래에는 유골 수백 구가 묻힌 구덩이와 뼈들의 희끗한 형상이 자리하는 셈이다. 그러나 아직도 충분히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역사적 사건의 빈 구멍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기 위해, 그렇다고 손쉽고 허망한 극복으로 빠지지도 않기 위해 작가는 눈(雪)의 이미지를 섬세하게 쌓아올리며 시간 바깥에 존재하는 시간을 만들어낸다.
1부에서 제주의 엄청난 폭설을 뚫고 인선의 집까지 가는 과정은 죽은 존재들을 불러내기 위한 하나의 관문이자 의례처럼 보인다. 죽은 새와 서울에 있는 인선이 실재처럼 등장하는 2부는 사실과 환상을 구별하기 어려운 하나의 긴 꿈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치거나 죽은 존재들이 잠시나마 살아나 삶으로 건너올 수 있단 말인가. 이를 설득하기 위해 인선은 제주공항 활주로 아래에서 발굴된 유골들 가운데, 모로 누워 깊게 무릎을 구부리고 있는 작은 유골 한 구에 주목한다. 그가 만약 십대였다면 출생 연도가 자신의 엄마 ‘정심’과 얼추 비슷했을 것인데, 그렇다면 이 이름 모를 유골과 정심의 생애는 묘하게 겹쳐지지 않겠냐는 주장이 그것이다. 한 사람의 유골은 날마다 수십 차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활주로 아래서 흔들렸고, 다른 한 사람은 외딴집에서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솜요 아래 실톱을 깔고 육십 년을 보냈다면, 이 죽음과 삶을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문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끔찍한 학살 이후 산 자와 죽은 자의 삶은 어둠 속에서 웅숭그린 형상으로 구별 불가능하게 흔들리며 겹쳐진다. 그리고 정심의 평생에 걸친 오빠 찾기는 아마도 수감되어 학살당했을 가능성을 뒤로하고, 희박한 그의 생존 가능성을 자꾸만 일으켜 세운다. 소설은 제주 4·3으로 떠나보낸 존재들을 어떻게든 다시 살려내려는 인물의 강력한 의지를 가볍고 부드러운 눈송이로 들어 올린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눈의 이미지는 무명천처럼 죽은 자들을 고요하게 덮어내는 동시에, 새처럼 박동하는 작은 생명력을 보이며 날아오른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또 다른 주인공은 사실 무정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눈이기도 하다.
언제나 핏빛 세계 안에서 죽음과 삶을 가로지르며 깨끗한 흰빛을 향해 솟구쳐오르는 한강의 소설을 두고 ‘흰 뼈의 미학’이라 명명하고 싶다. 인류가 만들어낸 끔찍한 살육의 역사는 아마도 불의 역사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 불 속에서 기이하게 녹지 않는 눈 한 송이를 발견해낸다. 영원히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는 눈송이. 여리지만 끝내 훼손될 수 없는 인간 안의 마지막 존엄성. 세계는 어두운 환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인간 안에는 외로운 흰 뼈들이 조용히 빛나고 있음을 그는 믿는다. 그렇게 그의 문학은 우리를 지켜낼 것이다.
■강지희 문학평론가
2008년 소설가 한강의 작품을 비평한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동물성을 가진 식물-되기-한강론’으로 등단했다.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이며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평론집 <파토스의 그림자>가 있다.
강지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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