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유학 시절 서점에 한국 작가 안 보였는데…만감 교차”[한강, 노벨 문학상]
한국학 교수인 남편 칼손과
황석영·한말숙 등 8권 번역
수상 전부터 ‘한강 열기’ 감지
젊은 작가 위한 토양 갖춰져
수월하게 세계 관심받을 것
“너무 기쁩니다. 너무 설레고 기분이 좋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네요.”
번역가 박옥경씨(58)는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 다음날인 지난 11일 오전 4시(현지시간) 통화에서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스웨덴 한림원이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를 선정한 것은 오랫동안 변방으로 여겨졌던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중심부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박씨는 1990년대 스웨덴 유학 중 만난 동갑내기 남편 안데르스 칼손과 함께 한강 작가의 <흰>과 <작별하지 않는다>를 스웨덴어로 옮겼다. 칼손은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에서 조선 후기 홍경래의 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00년부터 영국 런던대학교 동양아프리카대(SOAS) 한국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현재는 SOAS 한국학 연구소장이다. SOAS는 <채식주의자> 번역으로 2016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을 받은 데버라 스미스가 한국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박씨와 칼손 교수 부부는 현재 런던에서 살고 있다.
“스웨덴으로 유학을 간 게 1993년이었는데 당시에는 일본과 중국 작가 책은 서점에 있었지만 한국 작가는 안 보였어요. 1998년 무렵부터 번역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원고를 보내도 책을 내겠다는 곳이 없더군요. 그러다 스웨덴의 트라난 출판사가 선뜻 나서줘 책을 낼 수 있었습니다. ‘왜 이리 한국문학이 없지’라는 마음에서 시작했는데, 이렇게 좋은 소식이 발표되는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황석영 작가의 <한씨연대기>와 <오래된 정원>, 이문열 작가의 <젊은 날의 초상>과 <시인>, 윤흥길 작가의 <장마>, 한말숙 작가의 <아름다운 영가> 등을 포함해 한국 문학작품 8권을 번역했다.
국제적 인지도를 확보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건 영어 번역이지만,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이 스웨덴 학술기관이라는 점에서 스웨덴어 번역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한국 작가들이 노벨 문학상을 받으려면 스웨덴어로 번역된 작품이 6권 이상이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 적도 있다.
현재 한강 작가의 작품 중 스웨덴어로 번역된 것은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 <작별하지 않는다> 등 4권이다. 박씨 부부가 번역한 <흰>과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국어 원전을 스웨덴어로 직접 옮긴 것이다.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는 영어판을 번역한 중역본이다.
스웨덴 평론가 잉리드 엘람은 지난 3월 스웨덴 일간 다겐스 뉘헤테르에 쓴 글에서 “안데르스 칼손과 박옥경의 번역에서 한강의 산문은 눈의 결정처럼 맑고 가볍다”고 평가했다.
박씨는 “한국에서 노벨 문학상이 나온다면 한강 작가일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아직 50대여서 이르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지난 3월 열린 <작별하지 않는다> 북토크에 1000명 이상이 몰려 한 시간 넘게 줄을 서야 했다고 하더군요. 지난해 가을에는 스웨덴 왕립극장이 <채식주의자>를 연극으로 상연하기도 했습니다.”
박씨는 한강 작가 작품의 강점으로 전쟁과 폭력이라는 보편적 소재를 서정적이면서도 절제된 문체로 풀어냈다는 점을 꼽았다. “정치적 갈등으로 희생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나타나고 있어요. 당장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에서도 많은 목숨이 스러지고 있는데 아무도 책임을 지고 있지 않잖아요. 인간의 연약함과 그 연약함을 견뎌내는 인간 본연의 내면을 시적이고 절제된 문장으로 담아낸 것이 스웨덴인들의 정서에 잘 맞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박씨는 “외국에서 생소하기만 했던 한국문학이 오늘날 많은 외국 독자층을 확보한 데는 번역원의 꾸준한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번역 중인 작품은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다. <저주토끼>는 2022년 안톤 허의 번역으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오른 바 있다.
박씨는 이번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젊은 한국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토양은 충분히 갖춰졌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작가들은 선배 작가들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세계의 관심을 받을 것 같아요. 그러한 관심이 꾸준히 쌓이다보면 노벨상을 받는 또 다른 한국 작가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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