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의 손길]네포티즘의 시대
‘사적인 것들’이 밖으로 나오면
공적인 세계의 파괴·타락 불러
윤 대통령 ‘술친구’ 곳곳서 행세
김건희 여사 통제는 기대 난망
흔히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활동의 본질이 완전히 상반되기 때문이다.
우선 사적 활동의 본질은 ‘숨겨짐’이다. ‘사생활을 보장하라’는 말에 묻어나듯 이 영역에서 활동은 굳이 타인이 알 필요가 없다. 이 영역에서 우리 각자는 자신의 가치와 선택에 따라 삶을 영위하며 자신과 가족에게 필요한 것들, 특히 ‘부’를 축적하는 활동을 한다. 이 사적인 활동이 벌어지는 터전으로서 시장에선 ‘이기심’이 찬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반면 공적 활동의 본질은 ‘공개성’이다. 이 영역에서 활동은 모두가 투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하며, 때로 그렇지 않은 활동이 ‘일시적으로’ 있다면 반드시 기록을 남겨 나중에라도 모두가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국가 안전보장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기록물 같은 경우 보호 기간을 정할 수 있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공개해야 한다.
이렇듯 공개성의 원칙이 중요한 이유는 공적 영역이 ‘공통의 것’을 만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만약 ‘숨겨져야 할 이기심’이 ‘공통의 것을 만드는 활동’에 끼어들 때 한 국가는 부패가 만연한 곳이 되고 만다. 그래서 공적 활동을 하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는 ‘명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사적인 것들이 은둔처 밖으로 나와 공적인 역할을 떠맡을 때, 공통의 세계를 직접 파괴하고 공적인 활동에 필요한 객관적 거리를 지운다는 점에서 어디서나 타락을 낳는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사적인 것이 은둔처 밖으로 나와 공적인 역할을 떠맡는 일을 ‘네포티즘’(nepotism)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연고주의’ 혹은 ‘족벌주의’라고 옮기는데, 권력자가 혈연, 지연, 학연으로 맺어진 가까운 이들에게 주요 관직을 나눠 주는 일을 말한다.
이 용어는 라틴어로 조카를 의미하는 ‘nepos’(네포스)에서 나왔는데, 교회의 율법에 따라 자식을 가질 수 없던 가톨릭 교황이나 대주교가 조카들에게 고위 공직을 나눠주는 관행에서 유래한 용어다. 심지어 부패로 악명 높은 알렉산더 6세는 자신의 두 아들을 ‘조카’로 둔갑시켜 각각 공작과 대주교에 임명하기도 했다. 이 사례는 네포티즘이 ‘뻔히 보이는 거짓’, 뻔뻔함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네포티즘’으로 만연한 국가가 되었다. 검찰, 서울대, 대통령 친구 출신이 나라의 주요 행정 공직을 장악했다. 행정부뿐만이 아니다. 헌법재판소장은 대통령과 서울대 법대 79학번 동기다. 대법원장 후보에 올랐다 낙마한 이는 대통령과의 인연을 “제 친한 친구의 친한 친구”라고 답하기도 했다.
더 어이없는 건 그 네포티즘의 수준이다. 얼마 전 폭로된 김대남 녹취록에선 이 정권의 실세들이 대통령의 ‘술친구’라는 말이 나온다. 실제 여러 언론이 실세로 대통령의 술친구를 언급해 왔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대표적 인물이다. 고등학교 후배, 서울대 법대 후배, 거기에다 대통령의 술친구다. 그래서일까. 이 장관은 이태원 참사에 가장 책임 있는 인물이지만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히려 이태원 참사 직후 옆에 끼고 다니며 이 장관을 건드리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결과는 참혹했다. 연이어 오송 참사가 일어났다.
또 하나 더 깊은 한숨을 짓게 만드는 건 김건희 여사다. 여사가 관련되었거나 관련된 사건 목록을 보면 놀랍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사건, 코바나컨텐츠 협찬금 불법 수수 의혹, 모친의 통장 잔액 증명서 위조 가담 의혹, 대통령실 사적 채용 의혹, 명품 가방 수수 의혹, 양평 공흥지구 특혜 의혹 등 나열할 수 있는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은 검찰에 사건을 송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불가피하게 사건을 떠맡게 된 검찰은 기소하지 않는 방식으로 여사를 보호하기에 바쁘다. 아들을 조카로 둔갑시키는 뻔뻔한 노력을 공권력이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천개입 의혹, 비선개입 의혹마저 터져 나오고 있다.
‘네포티즘’을 통제하는 데 핵심은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가족, 특히 배우자를 통제하는 일이다. 2년이 넘도록 이 정권의 진짜 권력은 여사라는 말이 이어져 왔다. 명태균의 대통령 탄핵 협박도, 새로운 십상시 논란도 모두 여사와 이어져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아무 조치도 못하고 있다.
“내가 정권 잡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던 여사의 사적 욕망이, 아렌트의 표현처럼 ‘공적 세계를 파괴하고 가는 곳마다 타락을 낳고 있다.’
김만권 정치철학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나도 부정선거라 생각했다”···현장 보고 신뢰 회복한 사람들
- 국힘 박상수 “나경원 뭐가 무서웠나···시위대 예의 있고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 늙으면 왜, ‘참견쟁이’가 될까
- 공영방송 장악을 위한 이사장 해임 “모두 이유 없다”…권태선·남영진 해임무효 판결문 살펴
- 내란의 밤, 숨겨진 진실의 퍼즐 맞춰라
- ‘우리 동네 광장’을 지킨 딸들
- 대통령이 사과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사과해요, 나한테
-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에 차량 돌진…70명 사상
- [설명할경향]검찰이 경찰을 압수수색?···국조본·특수단·공조본·특수본이 다 뭔데?
- 경찰, 경기 안산 점집서 ‘비상계엄 모의’ 혐의 노상원 수첩 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