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소설 오픈런 한다는데…4만부 대려면 밤새야”
교보·예스24에서만 1분당 13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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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푸른 바탕 위로 곧 바스러질 듯한 꽃잎의 형상, 그 위에 세로로 정갈하게 적힌 책 제목에 이르기까지. 해 저문 지난 11일 저녁 8시께, 대낮처럼 환한 경기도 파주시의 아트인 인쇄 공장에서 한강 작가 소설 ‘채식주의자’의 표지가 독자들이 알고, 원하는 모습 그대로 거대한 인쇄기 두 대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검은색,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잉크를 담은 10m 길이의 기계는 입력값에 맞춰 ‘채식주의자’의 표지를 빈틈없이 찍어냈다. 또 다른 한 대는 1시간에 32만쪽을 찍어내는 속도로, 1m 높이로 쌓인 흰 종이를 들고 내며, 책의 본문이 될 검은 글자를 양면으로 인쇄했다. “좋은 수상 소식이 생겨서 찍는 거니까 최상의 품질로 만들어야죠. 표지 색이 잘 나오고 있는지 더 꼼꼼하게 보고 있어요.” 공장 한쪽에서 이 인쇄소 기장 표아무개씨가 모니터 속 표지 색과 인쇄된 표지의 색을 비교해 거듭 잉크 비율을 조절하며 말했다. 인쇄 경력만 20년 베테랑인 표 기장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7년 전부터 출판사 창비와 계약을 맺고 작가의 대표 저서 ‘채식주의자’를 인쇄하는 인쇄업체 아트인도 갑자기 분주해졌다. 이날 아침 8시30분 회사 단체대화방에 “오늘 ‘채식주의자’ 인쇄 작업 들어가야 합니다. 한강 작가님이 노벨 문학상 수상하셔서, 창비에서 연락이 왔어요”라는 대표의 메시지가 전해진 뒤, 인쇄 공장은 전에 없이 흥분과 긴장이 뒤섞인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수상 소식이 알려진 뒤 도심의 대형 서점부터, 동네 책방, 도서관, 온라인 서점에 이르기까지 물성을 지닌 한강 작가의 종이책을 원하는 독자들이 전국 곳곳에 넘쳐났다. 한시라도 빨리 책을 손에 넣기 위해 서점 문 열기를 기다리는 ‘오픈런’ 경쟁이 벌어지는가 하면, 대형 서점 누리집들은 한동안 접속장애를 겪기도 했다.
교보문고는 지난 10일 저녁 8시부터 13일 정오까지 단 사흘 만에 한강 작가의 작품이 시집과 소설, 외서를 가리지 않고 26만부가량 판매됐다고 밝혔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서는 수상 직후부터 13일 낮 2시까지 27만부가 나갔다고 한다. 두 플랫폼에서만 1분당 약 136권의 속도로 팔려나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점마다 비축하고 있던 재고는 동이 난 지 오래다. 책이 더 빨리, 더 많이 필요했다. 근래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특히 책 ‘채식주의자’는 지난 사흘간 ‘소년이 온다’에 이어 두번째로 많이 팔린 한강 작가의 대표작이다. 이번에 아트인이 출판사에서 주문받은 ‘채식주의자’ 인쇄 물량은 4만부. 지난 주말 공장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2만부를 찍어냈다. 표 기장은 “(주말에) 2만부를 찍기로 하고 우선 1만부 먼저 찍어서 보내기로 했다. 새벽 내내 인쇄기를 돌려서 아침에 제본소로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표 기장을 포함해 직원 6명이 분주하게 인쇄기의 움직임을 살폈다. 이들은 14일부터 나머지 2만부 인쇄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꼼짝없이 밤샘 작업을 하게 됐지만 직원들은 ‘겹경사’라며 즐거워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더해, ‘종이책을 애타게 찾는 독자’까지 확인한 덕이다. 신용운 아트인 생산팀 부장은 “평소 인쇄하던 양의 2~3배를 찍어내고 있다. 책이 부족해서 급히 생산에 돌입하는 건 국내 책 중에서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며 “우리가 인쇄하고 있는 책을 써내신 한강 작가님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게 그저 신기하고 좋다”고 말했다.
인쇄공장 직원들의 바람은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종이책이 다시 활력을 찾는 일이다. 신 부장은 “요즘은 종이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 업계가 침체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출판업이 좀 더 활발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표 기장도 다시, 종이책의 시대를 기대했다. “20년째 인쇄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점점 일이 줄어든다는 것을 느꼈어요. 학생 수가 줄면서 교과서조차 인쇄 물량이 많이 줄어 걱정하던 차에 기쁜 수상 소식이 들려온 겁니다. 인쇄업계에 좋은 탄력이 될 것 같습니다.”
고나린 기자 me@hani.co.kr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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