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뛴다…이젠, 오른다 사다리
스위스 4족보행 로봇 ‘애니멀’ 1.8m 사다리 3~4초면 올라
AI ‘강화 학습’으로 최적 행동…산업 현장 빠른 도입 기대
# 네 다리를 이용해 개처럼 걷는 로봇이 사다리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선다. 그러더니 이 로봇은 망설임 없이 사다리를 기어오른다. 사다리가 선 각도는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르다.그런데 이 로봇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다리를 휘젓고 몸통을 비틀며 사람만큼 빠르게 사다리를 오른다. 어른 키 수준의 사다리를 완전히 오르는 데에 몇초 걸리지 않는다.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ETH 취리히) 연구진이 최근 선보인 4족보행 로봇의 작동 장면이다.
최근 10여년 새 과학계와 기업들은 다양한 보행 로봇을 개발해왔다. 포장도로는 물론 바닷가 모래사장, 돌이 널린 들판, 계단을 걷는 로봇이 속속 개발됐다. 하지만 사다리는 로봇에 극복하기 힘든 난관이었다. 사다리 위에서는 발을 어디에 놓을지 잠깐만 망설여도 균형을 잃고 추락한다. 말 그대로 생명체처럼 기어오르지 않으면 사다리는 정복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스위스 연구진이 그런 로봇을 만들었다. 사다리를 오르는 일을 평지를 달리는 일만큼 쉽게 해낸다. 이 로봇, 도대체 어디에 쓰려는 것일까.
ETH 취리히 연구진은 최근 논문 사전공개사이트 ‘아카이브’를 통해 사다리에 오를 수 있는 4족보행 로봇 ‘애니멀’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애니멀의 외모는 지난 수년 새 각 기업과 국가에서 속속 내놓고 있는 다른 4족보행 로봇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다란 몸통에 진짜 개를 연상케 하는 다리가 장착됐다. 다리에는 유연한 움직임을 구현할 관절도 들어갔다. 한눈에 봐도 잘 걸을 듯한 외모다.
하지만 애니멀의 진가는 단순히 걷는 것이 아니라 사다리 앞에 섰을 때 나타난다. 애니멀은 연구진이 공개한 동영상 속에서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르게 세워놓은 길이 1.8m짜리 사다리를 거뜬히 오른다.
애니멀의 움직임은 ‘이것이 로봇이 맞나’ 싶을 정도로 민첩하다. 앞발 중 하나를 사다리의 첫 번째 가로 막대기에 얹더니 순식간에 나머지 발들을 교차해 가며 위로 치고 올라간다. 사다리 꼭대기까지 다다르는 데 겨우 3~4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연구진은 왜 사다리를 매우 빨리, 그리고 실수 없이 오르는 로봇을 만든 것일까. 산업 현장에 로봇이 속속 도입되고 있지만 사다리를 오르는 일은 여전히 작업자, 즉 사람의 몫인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다.
공장 순찰 등을 할 때 사다리를 탈 일이 생기면 지금은 항상 인간이 나서야 한다. 사람만큼 사다리를 빨리 탈 로봇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애니멀이 해결한 것이다. 로봇의 활용 범위를 크게 확대할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애니멀이 보급되면 사람이 사다리에 올라갈 일 자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인명사고 가능성도 자연스럽게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연구진은 “애니멀은 현재 가장 빨리 사다리를 타는 4족보행 로봇보다 무려 232배 빠르게 사다리를 오를 수 있다”며 “70~90도 각도로 세워놓은 사다리 등정 성공률이 90% 이상이었다”고 강조했다.
애니멀이 뛰어난 사다리 등정 능력을 지니게 된 비결은 ‘인공지능(AI)’이다. 연구진은 AI 기법 가운데에서 ‘강화 학습’을 사용했다. 강화 학습은 로봇이 특정 환경과 계속 부딪치면서 최적의 행동을 찾아가는 일이다. 한마디로 로봇에 자꾸 사다리를 오르게 해 스스로 가장 좋은 사다리 등정 방법을 찾을 수 있게 했다. 로봇은 사다리를 오르는 데 필요한 동작은 계속 시행하고, 사다리를 오르는 데 불필요한 동작은 하지 않는 일을 반복했다. 직장에서 같은 업무를 오래 한 사람이 ‘달인’이 되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다.
로봇의 다리 끝 말단 부위, 즉 발의 독특한 모양새도 애니멀을 사다리 오르기의 달인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연구진은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이 손을 동그랗게 말아쥐어 고리처럼 만드는 행동에 주목했다. 애니멀 발 형태를 아예 고리처럼 제작했다. 이 덕분에 애니멀은 사다리의 가로 막대기에 자신의 발을 쉽게 걸칠 수 있게 됐다.
연구진은 “애니멀은 사다리를 오르는 도중 누군가가 힘으로 방해를 해도 최대한 사다리 오르기를 이어갔다”고 덧붙였다. 사다리에 매달린 자신의 뒷덜미를 사람이 갑자기 세게 잡아당겨도 자세를 고쳐가면서 꿋꿋이 사다리를 오르는 모습이 작동 시험 도중 관찰된 것이다. 애니멀이 상용화한다면 사람과 함께 산업 현장에서 일할 로봇의 등장 시기가 크게 당겨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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