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철의 서울지리지] 조선시대 강남 핫플 봉은사 … 삼성동은 '스님 벌판'이었다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10. 1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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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국가 조선의 불교
승려 시험이 열렸던 봉은사 봉은사는 문정왕후가 불교 중흥을 위한 중심 도량으로 삼았던 절이다. 봉은사에서 치러진 승과시험을 통해 임진왜란 때 맹활약한 서산대사와 사명당이 등용됐다(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강남구 삼성동의 봉은사(奉恩寺)는 서울의 대표적 도심 사찰로서 불자는 물론 일반 관광객도 즐겨 찾는 명소다. 봉은사는 조선 11대 중종(재위 1506~1544)의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1501~1565)와 인연이 깊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재위 1545~1567)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불교 중흥을 선포한다. 봉은사를 중흥의 중심 도량으로 삼고 설악산 백담사의 보우(1509~1565)를 불러들여 주지에 임명한다. 그녀는 폐지됐던 선교양종(禪敎兩宗·불교 양대 종파)을 부활하고 승과(僧科·승려시험)도 재개했다. 승과는 봉은사에서 거행됐고 시험이 있을 때면 봉은사 앞 벌판은 수천 명의 승려가 가득 메웠다. 그래서 삼성동 일대를 '중의벌', 한자로는 '승과평(僧科坪)'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부활시킨 승과를 통해 서산대사(휴정·1520~1604), 사명당(유정·1544~1610) 등 걸출한 승려들이 등용됐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군을 지휘하며 평양성전투 승리에 크게 기여했으며 사명당 역시 평양성전투 등 다수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고 종전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데려왔다. 봉은사는 뜻밖에도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시대에 창건된 절이다.

조선은 유교국을 천명했지만 전조의 불교 유습을 청산하지 못했다. '성종실록' 1480년(성종 11) 10월 26일 기사는 "양종에 소속된 사찰을 헤아려보면 그 수가 1만보다 적지 아니하고…"라고 했다. 건국한 지 100년이 다 됐는데도 여전히 전국의 절이 1만개가 넘는다니 놀랍다.

귀천을 막론하고 인간은 누구나 살아서 부귀와 무병 등 길운을 바라고 죽어서는 명복을 염원하기 마련이다. 자기 수양을 강조하는 유교는 이에 대한 본질적인 해답을 주지 못했고 따라서 지속적인 국가적 탄압에도 불교는 소멸하기는커녕 오히려 성행했다. 불교 대중화의 중심에는 역설적이게도 조선왕실이 있었다.

탑골공원에 우뚝 선 이국적 탑 세조 때 창건된 원각사는 중종 때 폐사됐지만 이국적 탑(국보)과 원각사 창건 내력을 담은 대원각사비(보물)는 지금까지 원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1904년). 미국 헌팅턴도서관(잭 런던 촬영)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궁궐과 사직, 종묘가 있는 한양 도성 안에 화려하고 거대한 왕실 원찰을 짓기 시작했다. 수도 건설 후 가장 먼저 건립된 조선왕실의 정식 원찰은 흥천사(興天寺)였다.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는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가 죽자 정릉(貞陵)을 조성하며 능침사(陵寢寺)인 흥천사를 건설했다. 정릉 터는 영국대사관, 흥천사는 덕수초교 일대로 추정한다.

그러나 1409년(태종 9) 태종 이방원(재위 1400~1418)에 의해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강등되고 정릉도 파헤쳐져 도성 밖(성북구 정릉동)으로 내팽개쳐지듯 이장된다. 주인을 잃은 흥천사는 근근이 유지되다가 1510년(중종 5) 유생들의 방화로 폐허가 된다. 1669년(현종 10)에야 신덕왕후는 겨우 왕비로 복위되고 이장 후 방치되던 정릉도 왕릉으로서 재정비된다. 절도 능역 밖 성북구 돈암동에 다시 세워진다.

흥덕사(興德寺) 역시 태조가 건립한 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는 "태조가 잠저 동편에 덕안전(德安殿)을 지어서 희사하여 절로 삼았으니…"라고 했다. 태상왕으로 물러난 1401년(태종 1)의 일이다.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번과 방석,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가 피살된다. 이성계는 비명에 간 자식들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흥덕사를 지었던 것이다. 흥덕사는 도성 십승(十勝)에 꼽혔다. 경내에 맑은 연못이 있고 여름이면 이곳에 연꽃이 가득했다. 하지만 폭군 연산군 때 폐사돼 복원되지 못하고 절터에 민가가 형성됐다. 흥덕사 터는 서울과학고·종로구 시설관리공단 일원이다.

원각사(圓覺寺·탑골공원)는 1465년(세조 11) 세조(재위 1455~1468)의 명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너른 터에 세워졌다. 원각사를 지을 때 8만장의 기와가 소요됐고 주요 전각의 지붕은 궁궐에서만 사용하던 청기와로 장식했다.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조각한 이국적 원각사지석탑(국보)은 오랫동안 도성 명물로 인기가 높았다.

홍제천 보도각 백불 산모와 아기를 돌봐주는 백의관음을 형상화한 보도각 백불(보물)은 한양 인근에서 영험하다고 소문이 나 여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1904년). 미국 헌팅턴도서관(잭 런던 촬영)

서울 사찰 중 기록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확인되는 절은 장의사(藏義寺)다. 신라 태종 무열왕이 백제와의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장춘랑과 파랑의 넋을 기리기 위해 659년(태종 무열왕 6) 창건했다. 세검정초교 운동장 한 구석에 높이 3.63m의 통일신라 시기 장의사지 당간지주(보물)가 놓여 있다. 장의사지에서 홍제천을 따라 1.5㎞ 남짓 하류에 보물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 위치한다. 보도(普渡)는 "불법으로 널리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백불의 정식 명칭은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이다. 거대한 바위 면에 조각된 백불은 5m 가까운 크기이며 제작 시기는 고려후기로 본다. 백불은 신통한 기도처로 소문나 여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불상은 흰옷 차림의 비구니로 나타나 산모와 아기를 보살피는 백의관음(白依觀音) 형상이다.

성산(聖山)으로 인식돼온 북한산에는 골마다 대찰이 빼곡했다. '고려사'에 인용된 '삼각산명당기'는 "삼각산에 기대어 황제의 서울을 짓는다면 9년째 되는 해에 온 천하가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했다. 북한산 서편의 진관사(津寬寺)는 고려 8대 현종(재위 1009~1031)이 1012년(현종 3) 창건했지만 조선 개창과 함께 매년 국가 주관의 수륙재(水陸齋)가 성대하게 거행되면서 수륙재 중심 사찰로 부상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다.

조선 건국 과정에서 많은 고려 왕족이 죽었다. '태조실록' 1394년(태조 3) 4월 20일 기사는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모두 목 베었다"고 했다. 수륙재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처음 시행됐지만 세월이 흐르며 차츰 조선왕실 역대 조상의 명복을 비는 의식으로 변질됐다. 진관사는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줘 독서에 전념케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장소로도 활용됐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1442년(세종 24) 박팽년·이개·성삼문·하위지·신숙주·이석형 등 6명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진관사에서 독서하며 시문을 지어 서로 주고받기를 쉬지 않았다"고 했다. 치열하게 공부하며 진한 우정을 나눴을 이들 중 박팽년·이개·성삼문·하위지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던졌고 신숙주·이석형은 세조의 편에 서 영달했다.

경관이 수려한 북한천과 백운동 계곡에 위치한 중흥사(重興寺)도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학문을 닦는 장소로 애용했다. 조선중기 대문장가인 월사 이정구(1564~1635)는 21세 때인 1584년(선조 17) 중흥사로 들어가 학문에 매진해 당해 진사 초시를 통과하고 이듬해 연달아 진사 복시에 합격했다. 중흥사의 창건 시기는 12세기 이전으로 판단한다.

북한산 동편으로는 사모바위 밑의 승가사(僧伽寺)가 오래됐다. 756년(통일신라 경덕왕 15) 수태 화상이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경내 석굴(승가굴)에 승가대사 석조상(보물)이 안치돼 있으며 광배 후면에 1024년(고려 현종 15) 조각했다고 기록돼 있다. 승가대사(628~710)는 인도 승려로, 치병(治病)에 영험한 존재로 숭배됐다. 조선왕실도 치병을 위해 승가사를 찾았다. 태종과 세종비 소헌왕후가 병에 걸리자 승가사에 사람을 보내 재를 올렸다. 절 뒤쪽 바위에 높이 5.94m의 마애여래좌상(보물)이 조각돼 있다.

칼바위능선 등산로 입구의 화계사는 '궁절'로 불렸다. 궁궐 상궁들의 출입이 잦았고 비빈들의 후원 기록도 다수 남았다. '화계사략지'에 따르면 화계사는 1522년(중종 17) 창건됐고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이 크게 중수했다. 흥선대원군은 파락호 시절 화계사를 찾아 승려 만인에게 안동 김씨를 몰아낼 비책을 물었다. 만인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충청도 덕산의 가야사 금탑 자리로 이장하면 제왕이 될 후손을 볼 것이라고 귀띔했다. 가야사를 불태우고 탑을 허물어 묘를 옮겼더니 과연 둘째 아들이 고종으로 즉위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그렇게 뜨겁던 여름이 어느덧 지나가고 이제 아침저녁은 제법 쌀쌀하기까지 하다. 서울의 아름다운 옛 절을 기행하며 깊어가는 가을을 느껴보면 어떨는지.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고려사. 용재총화. 화계사략지. 동국여지비고.

2. 서울의 사찰. 서울역사편찬원. 2024'

도시는 멈춘 듯이 보여도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현대의 모습 속에 켜켜이 쌓인 역사를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지리지'는 매력적인 도시, 서울의 모든 과거를 땅속 유물을 건져내듯 들춰봅니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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