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과 컬러, 합성 같은 과거와 현재…만화로 그린 버틀러의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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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에 앉은 승객이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세요? 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로 갑니다.
여행객을 달가워하지 않던 사우디아라비아가 최근에 문호를 개방했다는 소식을 여러번 들었는데, 이 양반은 듣지 못했나? 사우디아라비아가 최근까지 이슬람 이전의 유적들은 일반인에게 개방을 하지 않았는데, 이젠 알울라를 대표적인 관광지로 소개하고 있다.
종교적으로 엄격하고 왕권이 강한 사우디아라비아에 부는 새바람을 기대하면서 가는 길인데, 옆자리 양반이 찬물을 끼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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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주일우의 뒹굴뒹굴 만화
킨
옆자리에 앉은 승객이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세요? 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로 갑니다. 흠칫 놀란다. 뭐 하시는 분인데 거길 가세요? 책을 만드는 사람이에요. 고개를 갸웃한다. 자기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유통업체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저는 포르투로 갑니다. 아, 아름다운 도시라고 들었어요. 그는, 회사를 사러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리야드라니! 그런 곳을 왜 가느냐고 다시 의문을 표했다. 나는 그곳에서 열리는 도서전에 초청을 받아서 가는 길이었다.
여행객을 달가워하지 않던 사우디아라비아가 최근에 문호를 개방했다는 소식을 여러번 들었는데, 이 양반은 듣지 못했나? 사우디아라비아가 최근까지 이슬람 이전의 유적들은 일반인에게 개방을 하지 않았는데, 이젠 알울라를 대표적인 관광지로 소개하고 있다. 그곳엔 서기 1세기 무렵에 집중적으로 건설된 바위무덤들이 피라미드와 같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매체를 통해서 소개돼 구미가 당기던 참이기도 했다. 종교적으로 엄격하고 왕권이 강한 사우디아라비아에 부는 새바람을 기대하면서 가는 길인데, 옆자리 양반이 찬물을 끼얹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부자들이 산다고 들었는데, 리야드 공항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내가 떠났던 인천 공항이나 경유를 위해서 들렀던 이스탄불 공항과 비교하면 시골 터미널 수준이다. 저 건너편엔 왕실 터미널이 따로 있다. 아마도 ‘신분’이 높은 분들이 따로 사용하는 곳일 것이라 짐작이 된다. 이렇게 분명하게 ‘신분’을 나누고 그에 따른 제한이 있는 나라는 낯설다. 공식적으로 이런 제한이 없는 나라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돈이나 공직에 근거한 사실상의 ‘신분’이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드러내놓으면 당황스러운 경우가 있다. 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귄 친구들을 모두 이름으로 부르는데 그래도 되는지 불편한 마음이 구석에 있다.
리야드 도서전은 국제도서전의 면모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영어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없고 저작권 거래도 활발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전시장에는 아랍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서 온 책들로 가득하다. 대부분 흰색이나 검은색 옷을 입은 독자들이라 전시장 전체는 흑백 영상 같은데 그림책과 만화책이 자랑하는 화려한 색깔이 더 선명하다. 옆자리에 앉은, 부르카를 입은 여인이 얼굴을 가린 천을 살짝 들어 주스를 마실 때 보인 빨간 매니큐어와 비슷한 느낌. 여인의 남편은 반팔 티셔츠에 야구 모자를 쓰고 있어 한장의 사진에 서로 다른 시대가 ‘합성’된 느낌이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을 만화로 그린 ‘킨’도 합성된 장면들로 가득하다. 주인공은 1976년을 살다가 1815년으로 건너갔다. 흑인 여성이다 보니 ‘노예 해방’ 이전으로 돌아간 삶은 생명의 위협의 연속이다. 뒤섞인 시대에서 작가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증오만이 아니라 우정, 사랑, 존경 같은 감정이 뒤섞여 자괴감과 수치심, 때로는 자기 연민으로 번진다. 이 책의 장점은 세상을 사는 입체적 인물들에 대한 단순한 판단을 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과거의 상식이 현대의 기준에서 야만스럽지만 그 시대를 살면서 그 시대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시간을 공간으로 바꿔, 사우디아라비아 여행에서 만난 장면들을 다시 곱씹어보고 있다. 다른 시간에 대한 버틀러의 통찰은 다른 공간을 만날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만화 애호가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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