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해서 하는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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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저 원수 같은 것’에서 원수는 정말 원수 같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박 터지게 싸워도 다시 보게 되는 것, 다시는 안 볼 것 같다가도 나도 모르게 만지고 있는 것. 그래서 ‘술이 원수다’라는 말은 중의적인 표현이다. 취해서 하는 섹스는 ‘실수’에 가까워 그 뒤엔 ‘술이 원수다’라는 말이 자주 따라온다. 후회와 자책의 정도만큼 중독적이고 참을 수 없는. ‘취해서 하는 섹스’는 그런 것이었다.
‘취해서 하는 섹스’에 관한 질문엔 매우 상반된 대답이 돌아왔다. ‘예민함 감소제’가 되기도 했다가 ‘흑역사 메이커’가 되기도 했다. 취해서 하는 섹스는 곧바로 한 서사로 이어진다. 소설 같은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소설을 쓰게 만들어주는. 그래서 인터뷰 중 듣는 얘기가 ‘진짜인가?’ 하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 이번 인터뷰는 남자와 여자 각각 2명이다. 나이는 20대로 거의 비슷하다. 40대나 30대의 인터뷰도 필요할까 싶었지만, 술 먹으면 변하는 건 고대 그리스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라.
27세 박주성은 내가 아는 남자 중 야한 얘기를 가장 잘한다. 여기서 ‘잘’은 ‘많이’가 아니라 진짜 ‘잘’이다. 그래서 박주성과 만나면 매번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저는 거기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리기 어려워서 집중에 방해되는 요소를 모두 없애려고 하는 편입니다.” 박주성은 자신의 결함을 잘 인지할 뿐만 아니라 그 해결책도 잘 알았다. “그래서 술을 유용하게 사용합니다. 저한텐 예민 감소제 같은 역할을 해주죠.” 박주성은 디지털 매거진 에디터였다. 그런 만큼 내게 잡다한 얘기를 정말 많이 해줬다. “와인이 얼굴을 발그레하게 만들기 가장 좋은 술인 것 같습니다. 여자들이 블러셔를 하는 것처럼 발그레한 남자도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니까요.” 그래서 박주성은 섹스하기 전엔 거의 와인을 먹는다고 했다. 시각적인 게 중요한 사람이었다. “저는 와인병, 와인잔도 예뻐야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것들이 거슬리기 시작하면 섹스할 때도 계속 생각납니다.” 미학적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박주성에게 섹스는 당연 좋은 것이었지만,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요즘은 바빠서 잘 못 합니다. 그래도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습니다.” 취해서 하는 게 좋습니까? “저는 취해서 하는 섹스를 좋아한다기보단, 취해야 섹스를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즐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안 취해도 섹스를 즐길 수 있다면 저는 취하지 않고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박주성은 나이가 들수록 취하지 않고선 섹스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도 집중만 되면 잘 섭니다.” 경쾌한 마무리였다.
“나는 술 냄새가 좋아요.” 술을 기능적으로 사용하는 박주성과는 달리 김준수는 술을 감각적인 것으로 사용했다. 김준수는 내 고등학교 동기로, 증권사에 근무 중이다. 박주성이 야한 얘기를 ‘잘’한다면 김준수는 섹스 얘기를 ‘많이’ 했다. 질보단 양인 셈이다. 반년간 내 옆에 앉았던 김준수는 쉬는 시간, 수업 시간 상관없이 야한 이야기를 했다. 자위와 섹스를 번갈아가며 말했고, 어떤 포르노 배우가 입으로 잘하는지, 어떤 배우의 뒤태에 끌리는지. 국적, 나이 불문 모르는 게 없었다. 그때는 김준수를 ‘변태’라고 불렀다. 지금도 여전히 ‘변태’라고 부른다. 하지만 ‘변태’ 고등학생과 20대 후반 ‘변태’는 다르다. 고등학생 변태는 당연한 거라면 20대 후반 변태는 취향에 가깝다. 취향을 영위하는 데는 적잖은 어려움이 따른다. 페티시를 받아줄 상대가 있어야 하고, 그걸 실현시켜줄 공간, 돈도 필요했다. 김준수에게 전화 가능하냐고 물으면 ‘ㅇㅇ’ 아니면 ‘ㄴㄴ’였다. 그는 항상 바빴다.
“페티시가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술 냄새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술 냄새 페티시가 있다고 말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어우 많이 다르죠.” 취하고 할 때랑 취하지 않고 할 때가 많이 다르십니까 하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었다. 내가 전화했을 땐 류다운은 친구와 밥을 먹고 있었다. 그는 25세 경제학과 대학생이다. 다음에 걸어도 된다는 내 말을 뒤로한 채 류다운은 밖으로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이번 주제는 뭔가요?” 류다운도 참 경쾌한 사람이다. 평소와 많이 다르다는 말에 얼마나 다르냐고 물었다. “평소면 약간의 절차를 밟겠죠. 대화도 좀 나누고, 껴안고 뽀뽀도 하고.” 그럼 취했을 땐? “저도 모르게 손이 바지 위에 가 있어요. 아 내 바지 말고 상대 바지. 마음이랑 몸이 따로 놀아요. 아니 어쩌면 이게 진짜 마음일 수도 있겠죠.” 상대 남자는 그런 류다운을 무지 좋아하겠습니다. “제가 취했다고 했을 때 어떤 남자는 ‘허걱 우리 집 놀러 올래?’라고 하기도 했어요. 귀여운 남자였죠.” 굉장히 귀여운 섹스를 추구하시는 분 같습니다. 그분은 파트너인가요? 애인인가요? “음, 애인이라고 해주세요.”
무슨 술을 주로 드세요? “주로 소주 먹어요. 와인은 배부르고, 테킬라는 너무 어렸을 때 먹던 술이고, 위스키를 샷으로 때릴 나이는 지났고. 제일 술술 들어가는 게 소주인 것 같아요.” 필름 끊긴 섹스를 해본 적 있으신가요? “필름이 끊긴 적은 없어요. 드문드문 생각이 지워져 있긴 해도요. 상대에게 나 이랬어? 하고 물을 때 ‘응’이라는 답을 들으면 이불킥을 조금 할 뿐이죠.” 그럼 술을 안 먹을 땐 소극적인 편인가요? “소극적이라기보단 지쳐 있어요. 그래서 지쳐 있는 사람이 좋아요. 너무 열정적인 사람은 싫어요. 정신은 건강한데 톤다운된 사람. 그래야 취했을 때도 텐션이 맞아요. 그래서 요즘 딱 그런 남자를 틴더에서 만났는데, 잘 안 돼서 속상해요.” 남자가 류다운을 안 좋아하는 것 같나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가끔 전화하면 요즘 연애하냐고 물어요. 그럼 저는 당연히 아니라고 하고요” 아까 말한 애인은 이라고 말하려다 그만 멈췄다.
“저는 취하지 않고 하는 게 더 좋아요.” 22세 이혜지는 소설과 시를 쓴다. 다른 글을 쓰기도 하지만 거의 시다. 문장 하나를 잡고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이 문장 어떻게 바꾸면 좋을까요?’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한다. 그런 이혜지에게 섹스도 한 문장 같았을까? “술 먹고 하면 까먹어서 싫어요.” 소중한 사람과만 섹스하는 이혜지는 그 순간이 다 의미가 있었다. “어차피 망각하겠지만, 그 과정도 의미가 있잖아요.” 그럼 애인과의 섹스도 거의 술을 안 드십니까? “취하지 않고 하는 섹스를 더 좋아하지만, 애인이라면 상관은 없어요. 취하든 안 취하든, 필름이 끊겨도 상관없어요.” 상관이 없다?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말은 아니고요. 애인이니까 취한 섹스든 안 취한 섹스든 괜찮다는 말이에요.” 이혜지의 모든 단어엔 의미가 첨예하게 존재했다. “근데 술 먹으면 본능이 앞서잖아요, 물론 인간도 동물이지만 사랑보단 본능이 앞선 섹스는 크게 하고 싶지 않아요.” 연애를 하고 계십니까? “쉽지 않네요 . 그냥 옆에 두고 있어요. 아직 기대하고 싶어요.” 이혜지는 자신이 정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로맨틱한 분인 것 같습니다. “근데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사람과 본능적으로 섹스해도 낭만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왜 . “원래 이런 생각은 갑자기 들잖아요.” 이혜지는 일말의 기대, 약간의 정, 소심한 복수, 이런 것들이 잘 어울렸다. “저는 소맥 먹어야 잘 취해요. 그래서 가끔, 아주 가끔 취하고 싶을 땐 남자친구랑 소맥을 먹자고 말해요.” 소설 쓰는 사람은 소설 같은 삶을 산다기보단 일상을 소설같이 받아들이는 것 같다. 취해서 하는 섹스가 좋은 사람도 있고, 필요한 사람도 있고 취향인 사람도 있고 싫은 사람도 있다.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은 없었다. 원수 같은 게 분명했다.
* 기사에 등장한 모든 인물의 이름과 직업은 가상으로 바꿨습니다.
Editor : 주현욱 | Words : 백윤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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