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매수 전쟁 시대…법원 ‘고려아연 자사주 방어’ 인정 [허란의 판례 읽기]
SM엔터·고려아연 사례로 적대적 인수 대응 진화
[법알못 판례 읽기]
지난해 SM엔터테인먼트에 이어 최근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으로 ‘공개매수’가 국내 주식시장에서 중요한 화두로 부상했다.
공개매수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주식을 매수하는 방식으로 적대적 인수합병(M&A), 대주주의 경영권 방어, 지주회사 전환, 상장폐지 등에 활용된다. 공개매수가 한국 M&A 시장 판도를 바꾸는 변수로 부상한 가운데 법원 판결도 이런 변화에 발맞추는 상황이다.
최근 공개매수 진행 중 대상 회사의 자사주 취득이 위법하지 않다는 법원의 첫 판단이 나와 주목된다.
이번 판결은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서 자사주 취득의 적법성을 인정한 것으로, 특히 상법과 자본시장법이 자사주 취득 ‘목적’에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자사주 취득 적법성 판단에 중요한 선례가 될 전망이다.
“공개매수 중 자사주 취득 위법 아니다”
서울중앙지법 제50민사부(김상훈 부장판사)는 10월 2일 영풍이 고려아연 이사들과 한국투자증권을 상대로 낸 자사주 취득 금지 가처분 신청(2024카합21412)을 기각했다.
영풍은 고려아연 이사회의 자사주 취득이 위법하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공개매수 진행 중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사주 취득이 곧바로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영풍은 고려아연 지분 25.4%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지난 9월 13일 사모펀드 한국기업투자홀딩스(MBK파트너스)와 공동으로 고려아연 주식에 대한 공개매수를 시작했다. 재판부는 영풍과 고려아연이 자본시장법 제140조의 특별관계자 관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자본시장법 제140조는 공개매수자와 특별관계자의 공개매수 기간 중 주식 매수를 금지하고 있다. 재판부는 “영풍과 고려아연이 주식 공동 취득·처분, 상호양수도, 의결권 공동행사 등에 관해 명시적 합의를 한 사실이 없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영풍이 고려아연을 상대로 신주발행무효 소송을 제기하고 고려아연이 이번 공개매수에 반대 의사를 표시한 점 등을 근거로 양측이 ‘공동보유관계’에 있지 않다고 봤다.
재판부는 나아가 “자본시장법은 공개매수 기간 중 대상 회사의 자사주 취득 가능 여부에 대해 별도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에 “공개매수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개매수자와 특별관계자 지위에 있지 않은 회사의 자사주 취득이 곧바로 위법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서 자사주 취득의 적법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번 판결로 공개매수 대상 기업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경영권 방어에 나설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다만 구체적 사안에 따라 이사의 의무 위반 여부 등이 달리 판단될 수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당가능이익 산정 방식도 논란
이 판결 직후 고려아연은 2조7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공개매수를 개시하며 경영권 방어 전략을 본격화했다. 그러나 MBK·영풍 연합은 즉각 2차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며 대응에 나섰다.
2차 가처분 소송의 핵심 쟁점은 배당가능이익 한도 내 자사주 매입인지 여부다. 현행 자본시장법 제165조의3 제1항 및 제2항은 배당가능이익 내 자기주식 취득 주식 수에 대해 아무런 제한을 두고 있지 않다.
MBK·영풍은 고려아연의 배당가능이익이 586억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고려아연은 6조원 이상이라고 맞서고 있다. MBK·영풍은 고려아연 규정에 따라 중간배당 시 임의적립금을 배당가능이익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고려아연은 상법과 자본시장법을 근거로 배당가능이익은 순자산에서 법정 준비금 등을 제외한 금액으로 계산될 뿐 임의적립금을 공제하지 않는다고 맞서고 있다.
SM엔터·고려아연 분쟁으로 ‘공개매수’ 부상
공개매수가 국내 M&A 시장에서 주목받게 된 대표적인 사례는 SM엔터테인먼트와 고려아연이다.
2023년 2월 불거진 SM엔터테인먼트의 경영권 분쟁의 경우 창업자 이수만과 이사회가 대립했다. 이수만은 하이브와 손을 잡았고 이사회는 카카오와 제휴를 선택해 각각 공매매수에 나섰다. 이처럼 주주 간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경영권 다툼이 격화됐다.
고려아연 사례는 이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최대주주인 영풍이 지분을 확대하기 위해 공개매수에 나섰고 이에 대해 고려아연 이사회는 자사주 공개매수로 맞대응하며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두 사례 모두 공개매수 과정에서 이사회의 역할이 중요하게 다뤄졌다. SM엔터테인먼트 사태에서는 이사회가 카카오와의 제휴를 선택해 경영권 방어에 나섰고 고려아연 사례에서는 이사회가 영풍의 공개매수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강송욱 법무법인 디엘지 변호사는 “공개매수 상황에서 이사회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며 “미국처럼 한국에서도 이사회 중심의 경영 원칙이 강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돋보기]
자기주식 취득 규제, IMF 이후 지속 완화
자기주식 취득에 관한 법령은 지속적으로 완화돼 왔다. 특히 IMF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경영권 방어 수단을 확충하기 위해 관련 규제가 대폭 완화됐다.
구 증권거래법은 당초 상장법인의 자기주식 취득을 발행주식 총수의 10% 이내로 제한했다. 그러나 IMF 사태 직후인 1998년 2월 개정을 통해 이를 3분의 1 이내로 확대했다. 불과 3개월 뒤인 1998년 5월에는 아예 취득 주식 수 제한을 폐지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배당가능이익 한도 내에서 제한 없이 자기주식을 취득할 수 있게 됐다.
2009년 시행된 자본시장법도 이 같은 기조를 유지해 주권상장법인이 자기주식을 취득하는 목적에 대해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기본적으로 자사주 매입을 이사회의 재량 판단 영역으로 본 것이다.
다만 취득 방법에 있어 △장내 매수 △모든 주주에 대한 통지·공고 △공개매수 △신탁계약 해지·종료 시 반환 등 네 가지로 제한하고 있다. 상법 역시 2011년 개정을 통해 자기주식 취득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기존에는 원칙적으로 금지하던 자기주식 취득을 배당가능이익 범위 내에서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것으로 바꿨다. 법무부는 당시 개정 취지에 대해 “자본시장법 개정에 발맞춰 주가 부양이나 경영권 방어 등에 자기주식 취득을 활용하는 방안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1985년 미국 우노칼 판결은 국내 하급심 판결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델라웨어주 대법원은 “이사회가 공개매수가 부적절하고 강압적인 것으로서 회사에 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경우 이사회는 그러한 공개매수에 반대할 권한과 의무가 있다”며 우노칼 이사회가 적대적 공개매수에 대항해 실시한 자기주식 공개매수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이는 적대적 M&A에 대한 이사회의 방어 권한을 인정한 획기적인 판결로 평가받는다. 최근 고려아연 판결에서도 이러한 미국 판례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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