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말라리아 정복’ 빌 게이츠의 꿈, 한국이 이룬다
말라리아 돌연변이 잡는 진단키트 개발
에티오피아·브라질서 임상시험 진행
지난 2022년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는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자선사업으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며 “소아마비와 말라리아 퇴치가 나의 꿈”이라고 말했다. 지난 9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넷플릭스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왓츠 넥스트?(What’s next?)’도 게이츠가 말라리아를 근절하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게이츠의 꿈을 실현하는 한국인 과학자들이 있다. 라이트재단(국제보건연구기술기금)과 체외 진단키트 기업인 래피젠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의 지원을 받아 말라리아 돌연변이 진단키트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만난 김한이 라이트재단 대표는 “라이트재단은 보건복지부와 게이츠재단, 국내 바이오 기업들이 출연해 2018년 설립한 단체”라며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 펀드를 세계 보건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한국의 우수한 연구개발(R&D) 인력이 세계 보건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라이트재단은 출범 초기부터 게이츠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두 재단은 수시로 전 세계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어떤 프로젝트가 필요한지, 우려 사항은 없는지 등을 논의한다.
라이트재단과 래피젠의 말라리아 돌연변이 진단 키트 프로젝트도 이렇게 시작됐다. 두 재단은 매년 약 60만8000명 정도가 말라리아로 사망하고 있지만, 상업적으로 이익을 많이 내기 어려워 이 분야에 투자하는 기업이 많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더구나 먼저 개발된 말라리아 진단 키트도 돌연변이가 등장하면서 무용지물이 된 상황이었다.
김한이 대표는 “라이트재단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글로벌 보건에 기여할 만한 한국 파트너를 발굴하는 것”이라며 “말라리아 분야에 흥미가 있으면서도 필요한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기업을 찾아야 했는데, 래피젠이 적격이었다”고 설명했다.
래피젠의 핵심 기술은 금 나노입자다. 일반적으로는 말라리아 진단 키트는 20~40㎚(나노미터·10억분의 1m) 크기의 붉은색 금 나노입자에 말라리아 항원 단백질을 인식할 항체를 붙인 형태다. 래피젠은 금 나노입자를 80~120㎚로 늘려 항원이 붙을 표면적을 늘렸다. 이렇게 만든 검은색 나노입자를 활용해 말라리아 감염 환자를 찾는 민감도를 90% 이상까지 높일 수 있었다.
박재구 래피젠 대표는 “검은색 금 나노입자를 기반으로 열대열 말라리아와 삼일열 말라리아를 동시에 진단할 수 있는 키트를 개발했다”며 “검은색 금 나노입자로 90% 이상의 민감도를 기록한 건 세계 최초”라고 말했다.
김한이 대표는 “혁신은 보통 최초 성과를 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글로벌 보건 분야에서는 이미 나와 있는 기술이라도 성능을 크게 높이거나 누구나 쉽게 생산·사용할 수 있게 하고, 비용을 낮추고 품질을 높이는 혁신이 필요하다”며 “검은색 금 나노입자는 기존 말라리아 진단 기술을 획기적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래피젠은 앞으로 32개월 동안 라이트재단의 투자를 받아 말라리아 돌연변이 진단키트를 개발하고, 임상시험을 진행할 계획이다. 임상시험은 에티오피아와 브라질에서 진행한다. 모두 열대열과 삼일열 말라리아 원충의 돌연변이 비율이 높은 지역으로, 말라리아 진단 키트의 성능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시험대다.
래피젠은 말라리아 돌연변이 진단키트 개발이 마무리되면 세계보건기구(WHO)의 사전적격성심사(PQ)에 도전한다. PQ 승인을 받아야 WHO 산하기관이 주관하는 국제 입찰과 공급 자격이 주어진다. 미 식품의약국(FDA)이 고소득 국가 기준으로 기술을 판단한다면, WHO는 중·저소득 국가를 기준으로 검토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어린아이가 사용해도 안전한지, 만드는 과정이 간단해 어느 국가에서나 생산이 가능한지 등을 고려한다.
박재구 래피젠 대표는 “내년까지 임상시험을 끝내고 2027년까지 WHO PQ를 완료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라이트재단은 투자가 끝난 뒤에도 래피젠이 WHO PQ 과정을 거쳐 키트를 전 세계에 공급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미국과 유럽 기업이 주도하던 글로벌 보건 진단 키트 시장에 한국 기업도 합류하는 것이다.
김한이 라이트재단 대표는 “우리나 게이츠 재단 모두 한두 회사가 전 세계 시장을 독점하기보다는 균형 있는 생태계를 꾸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계기로 전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진단 기술이 국제적으로 다시 한번 인정받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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