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열풍에 담긴 계급 코드와 흥행 전략[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저게 하도 오래 닫혀 있으니까 이젠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야.”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2013)에 나오는 대사이다. 끝없이 달리기만 하는 열차 안에서 오랜 시간 빈민굴 같은 꼬리칸에만 있었던 남궁민수(송강호 분)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이같이 말한다. 그는 자신을 그 자리에만 머물게 했던 벽이 사실은 호화로운 일등칸으로 가는 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를 깨달은 사람에게 남은 일은 무엇일까. 그 문을 활짝 열고 앞으로 진격하는 일뿐이다.
‘계급’이라는 소재는 이처럼 영화, 드라마 등에 자주 활용되어 왔다. 뜨거운 반응을 얻은 작품들이 많아 한국 콘텐츠 산업을 지탱해온 핵심 소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뜨거운 열풍을 일으킨 ‘오징어 게임’도 계급 이야기였으니까. 이런 작품 속 주인공이 품은 신분 상승의 욕망, 그 꿈을 향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했다.
그런데 재미를 강조하는 예능에서도 계급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나왔다. 지난 9월 17일 첫 공개된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하 ‘흑백요리사’)이다. 제목만 보면 요리와 계급이라는 이질적인 소재를 같이 가져왔다는 점에서 다소 어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올 들어 최고의 화제 예능으로 꼽힐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전 세계적으로도 사랑을 받아 3주 연속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시리즈 부문 1위에 올랐다. ‘제2의 오징어 게임’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계급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다. 이 프로그램은 계급 코드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 그 이상을 보여줬다. 욕망, 예술성, 장인정신, 품격과 경륜 등이 한데 어우러져 기존 서바이벌에서 미처 찾아볼 수 없었던 색다른 시너지를 냈다.
희망과 욕망을 끌어올리는 무협지 서사
‘흑백요리사’는 요리사 100명을 흑수저, 백수저로 나눠 치열한 요리 경쟁을 벌이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재야의 고수’ 80인의 요리사가 흑수저, 이미 업계와 대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유명 요리사 20인이 백수저이다. 사회적 계급을 나눌 때 많이 언급되는 용어 ‘흙수저’, ‘금수저’를 활용한 콘셉트이다.
우승을 하는 한 명의 셰프에겐 3억원이 주어진다. 하지만 우승과 상금을 떠나 흑수저들에겐 크나큰 기회이자 영광이 주어진다. 백수저와 한자리에서 경연을 하는 것 자체가 그렇다. 실제 현실에서 흑수저 요리사가 백수저 요리사를 직접 만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고 대결은 꿈조차 꾸기 어렵다.
그런데 백수저와 오직 요리로만 진검 승부를 펼칠 수 있게 되자 흑수저들은 크게 감격한다. 이 과정에서 오랜 시간 내면에 숨겨져 있던 희망과 욕망, 두려움이 한데 뒤섞여 분출된다. 시청자들 역시 그 펄떡이는 감정을 함께 느끼며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계급의 장벽과 격차를 부각하는 초반 설정은 흑수저들의 신분 상승 욕망을 부추긴다. 20명의 백수저들은 모두 1라운드를 하지도 않고 부전승으로 2라운드에 진출한다. 즉 1라운드는 온전히 흑수저들만의 싸움이다.
그 벽도 굉장히 높게 설정했다. 80명 중 20명만이 2라운드로 올라가게 된다. 흑수저가 수많은 흑수저들을 힘겹게 이겨야만 비로소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갈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과 많이 닮았다.
1층에서 흑수저들이 혼신을 다해 요리를 하고 있을 때 이미 2라운드에 올라간 백수저들은 2층에서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다. “이 규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퇴장해도 좋다”는 안내에도 흑수저들은 전원 1라운드에 참가한다.
백수저와 달리 흑수저는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없고 별명만으로 참여하게 되지만 이 또한 받아들인다. 차갑고도 엄격한 세상의 규칙, 웬만해선 명함조차 내밀기 힘든 경쟁 사회, 그럼에도 나아가기 위해선 인내하며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점에서 현실의 축소판을 보는 것만 같다.
2라운드부터는 본격적으로 계급, 명성을 떼고 요리로 진검 승부를 펼치게 된다. 외식업계의 대부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 대한민국 최초로 미슐랭 3스타를 받은 안성재 셰프가 눈을 가린 채 참가자들의 음식을 맛보는 모습은 크게 화제가 됐다.
누가 만든 음식인지 모른 채 철저히 맛으로만 평가를 하는 ‘블라인드’ 테스트인 것이다. 이 설정은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흑수저에게 그동안엔 없던 기회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세트장 밖으로 확장된 새로운 경연, 그 승자는
그런데 만약 백수저들이 경연에 참가하지 않고 흑수저들만의 경쟁으로 프로그램이 전개되었다면 어땠을까. 기존 프로그램들과 차별화가 되지 않아 지금처럼 흥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 콘텐츠 시장에선 수많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나왔다. 이 프로그램들의 대부분은 유명하지 않은 일반인 도전자들을 중심으로 꾸려졌다. 이들끼리 경쟁을 하고 실력을 증명해 보이는 식이었다. 처음엔 일반인 도전자가 유명해질 수 있는 ‘사다리’가 된다는 점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점점 식상해졌다.
여러 개의 유사 프로그램이 양산되고 차별화된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흑백요리사’에선 일반인 도전자들의 롤모델이자 목표 대상인 유명 셰프들이 눈앞에 대거 등장한다. 기존 작품들이었다면 이들을 심사위원 자리에 앉혔을 것이다. 하지만 ‘흑백요리사’는 흑수저와 백수저가 함께 경쟁을 하도록 했다. 덕분에 잘 쓰인 한편의 무협지와 같은 서사가 펼쳐졌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성공 비결은 백수저 그 자체에 있다. 백수저는 단순히 흑수저가 ‘넘어야만 하는 산’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흑수저들이 자신만의 도전정신과 개성을 보여줬다면 백수저는 철옹성 같은 탄탄한 실력, 경륜, 철학을 보여줬다.
시청자들은 그들의 요리를 보는 것만으로 어떻게 독보적 경지에 오르게 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높은 자리에 오르고도 요리 앞에선 한없이 겸허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을 보며 ‘거장’이란 타이틀에 담긴 진정한 함의를 깨닫게 됐다.
결국 ‘흑백요리사’엔 계급 코드 이외에도 전문가들의 ‘조화’가 흥행 비결로 작용했다. 흑수저와 백수저가 함께 어우러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사랑하며 몸 담고 있는 분야에 관한 모든 것을 펼쳐보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실력, 아이디어, 철학, 연륜 등 다양한 가치가 부각되며 새로운 재미와 감동을 자아냈다.
요리라는 소재를 가져온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요리는 모두의 일상에 가까이 있는 소재이다. 시각적, 미각적 요소도 동시에 충족하기 때문에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청자가 해당 요리를 직접 맛볼 순 없지만 그래서인지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는 효과가 크다.
방송가에 오랜 시간 ‘쿡방’이 대세로 자리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흑백요리사’는 한발 더 나아가 254가지에 달하는 각양각색의 요리를 만들어내며 요리 그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흑백요리사’의 시즌1은 끝이 났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경연은 계속되고 있다. 세트장 안에서의 경연이 세트장 밖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흑백요리사’에 나온 셰프들의 식당에 이들의 요리를 먹어보고 싶어하는 손님들이 몰려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미식예찬’ 등을 쓴 프랑스 법관이자 미식가 앙텔름 브리야사바랭이 “새로운 요리를 발견하는 일이 새로운 별을 발견하는 것보다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든다”라고 했던 것처럼 새로운 요리와 셰프를 발견한 대중의 관심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진짜 진검 승부는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화면으로만 봤던 요리사의 요리를 직접 먹었을 때 감동을 할 수도 있지만 약간은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 평판이 결국 각 요리사가 받아들게 될 최종 성적표가 되지 않을까. 현실의 견고한 벽을 활짝 열린 문으로 바꿀 진정한 승자는 과연 누가 될지 궁금해진다.
세트 밖에서 대중의 참여까지 이끌어낸 ‘흑백요리사’. 앞으로 나올 콘텐츠들도 이런 영리한 전략으로 다가간다면 보다 큰 사랑을 받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김희경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kimhk@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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