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들어간 내 속 좀 봐주시오··· 농심은 '섭씨 死도' [하상윤의 멈칫]
최악의 이상기후가 농촌에 남긴 상흔
재해 앞 유명무실 '농작물재해보험'
유난히 뜨겁고 길었던 여름이 지나고, ‘결실의 계절’이 돌아왔다. 유례없는 이상기후가 농토 곳곳에 남긴 흔적들은 처참했다. 절기의 선을 넘어 9월까지도 이어진 폭염의 여파는 대지 위에 발 딛고 선 농민들에게 가장 먼저, 가장 가혹하게 가닿았다. ‘배춧값, 과일값이 오른다’는 짜증 섞인 반응들을 잠시 제쳐두고, 끝나지 않은 ‘그 여름’을 버텨내고 있을 그들을 만났다. 붉게 타들어가고, 갈라지고, 말라비틀어지고, 녹아내린 '결실'을 마침내 손에 쥔 농민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기후위기가 농촌에서 빠르게 현실화하고 있지만, 국가는 대단히 느리고 그들이 내놓는 대책은 대개가 미흡합니다.”
전남 영암군 농민 민형식(52)씨는 벼멸구로 초토화된 볏논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민씨는 “이제껏 농사짓는 동안 이토록 멸구가 지독하게 기승을 부렸던 적이 없었다”라며 “높아진 기온과 함께 산란·부화 주기가 짧아진 멸구의 개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들의 창궐 앞에 알곡은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렸다”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나마 있는 재해보험도 운용 행태를 보고 있자면 갑갑할 따름”이라며 “수확 불능 상태의 나락을 가져다 무게로 피해 정도를 측정하는 게 무슨 현실성이 있는가?”라고 말하며 현행 농작물재해보험 제도의 손해평가 방식의 허점을 지적했다. 이상고온이 벼멸구 창궐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농민들의 성토가 이어지자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8일 농업재해대책심의위원회를 열어 벼멸구 피해를 농업재해로 인정했다.
“전례 없는 폭염으로 작물들이 이렇게 죽어 나가도 보험사는 고사 원인을 병충해로 돌립니다. 결국 인과를 증명하는 건 농민의 몫으로 돌아오는데, 이 구조 안에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좌절합니다.”
화훼농민 조우철(63·전남 강진)씨는 말라붙은 장미가 즐비한 시설 하우스에 서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는 “장미를 키우는 농민으로서 오랜 세월 수많은 여름을 경험했지만, 올여름만큼 나무가 많이 죽은 해는 없었다”라며 “폭염 이후 생산량이 40%까지 떨어지고서 아직도 회복이 안 되고 있다”고 털어놨다. 또 조씨는 “이토록 무자비한 자연재해 앞에서 의지할 것이라곤 재해보험뿐인데 그마저도 가장 필요한 순간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폭염 피해는 임산물에도 예외가 없었다. 대봉감 과수원에서 만난 농민 박춘홍(58·전남 영암)씨는 드문드문 열매를 맺은 감나무를 가리키며 “일소(햇볕 데임) 피해를 받은 대봉감이 하나둘 다 떨어지고 남은 것들이다”라고 소개하며 “예년에 비해 (수확량이)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햇볕 데임은 자외선과 고온에 의해 과실이 검게 그을리며 세포가 괴사하는 현상으로 농사 소득 감소의 직접 요인으로 작용한다. 영암군에 따르면 올해 금정면 등 대봉감 재배농가의 농지 809㏊ 중 50%가 넘는 480㏊에서 햇볕 데임 피해를 봤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박씨는 “기후재난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라며 “이상기후와 맞물려 생산비는 갈수록 치솟고 생산량은 바닥을 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낙과가 그득한 배 과수원에서 만난 임동순 아산시 둔포면 염작2리 이장은 폭염에 의해 열과(표면이 쩍쩍 갈라지는 현상) 피해를 입은 과실들을 하나둘 들어 살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는 “열과는 현행 농작물재해보험으로 보상 받을 길이 없다”라며 “열과에 의해 수확량의 절반 이상이 수확 전에 떨어지거나 수확 이후에 폐기된다”고 설명했다. 임 이장은 산더미처럼 쌓인 채 썪어가는 과실 더미 앞에 서서 “자연을 거스를 수 있는 농업은 없다”면서 “그러나 내년도 올해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 섬뜩함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수확을 앞둔 제주 감귤밭도 상황은 비슷했다. 지난 4일 찾은 서귀포 성산읍 수산리의 ‘극조생’ 품종 감귤 과수원 바닥엔 열과(열매가 터지는 현상) 피해를 본 낙과들이 가득했다. 그나마 가지에 남은 감귤은 색이 나지 못해 짙은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일교차가 클수록 감귤의 착색이 빨라지지만, 올해는 지난 9월까지도 열대야가 이어지며 낮과 밤의 온도 차이가 크지 않아 감귤 착색이 제때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기존 감귤 유통 관련 조례에 의하면 감귤 열매 착색률이 50% 미만이면 시장에 유통할 수 없다. 제주도는 이상기후라는 특수성을 고려해 이달 2일부터 착색률과 상관없이 푸른 감귤이어도 당도가 높으면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제주도 감귤 생산 및 유통에 관한 개정 조례를 시행했다.
"40년 넘는 세월 농사를 지어왔지만, 올여름은 분명히 달라요. 처음 심은 배추는 땡볕 더위에 타 죽었고, 다시 심은 배추는 국지성 폭우로 물에 잠겨 죽었습니다. 남은 게 없네요."
전남 해남군 농민 김종주(68)씨는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들이닥치며 황무지로 변한 배추밭에 서서 심정을 털어놨다. “매일 같이 배춧값이 폭등한다는 뉴스가 쏟아지지만, 현장은 그럴수록 더 소외돼요. 마트에서 배추가 포기당 만 원까지 간다는데, 농민들이 손에 쥐는 건 650원 또는 700원입니다.” 김씨는 “정부가 나서서 농민들이 안정적으로 먹거리를 공급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정책을 펴야 하는데, 허구한 날 ‘수입 카드’ 꺼내 들고 흔드니 농민들은 죽을 지경이다”라고 말했다.
편집자주
아메리카 원주민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하상윤 기자 jony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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