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치사량’ 초과의 순간들[언어의 업데이트]
낭만은 저항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현실에 순응하는 것을, 대세를 따르는 것을, 적당히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는 데서 낭만이 시작된다. 프로 스포츠의 ‘원팀맨’이 낭만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아닌 신념을 택했기 때문이다. 자신만 알아보는 세부를 위해 혼신을 다하는 마음이 낭만인 이유는 효율성의 지배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대세를 따르는 대신 개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시류에 편승하기보다 자기만의 물길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효율보다 마음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알기에 낭만이 깃든 것들은 늘 더 아름다워 보였고 낭만은 매번 나를 너무 쉽게 설득했다.
눈 깜짝할 사이 너무 많은 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현실에서 조금만 발을 떼어도 한참 뒤처지는 기분이다.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기가 두렵다.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이 나에서 우리로 확장되면 더 그렇다. 낭만은 돌연 낭비가 되고, 쉽게 무책임으로 변질된다. 세상으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는 재능도, 밥벌이에서 멀어질 용기도 없는 평범한 나는 시대의 목표인 효율과 생산성을 거슬러 낭만을 선택할 그릇이 되지 못함을 슬프게 받아들인다. 낭만은 점점 어려워지고 멀어진다. 그런데 웬걸 ‘낭만’이라는 말이 전보다 더 자주 더 많은 사람의 입과 손을 오르내리고 있다.
경북 구미시는 2023년 ‘낭만축제과’를 신설했다. 공단과 기업만 있는 산업도시라는 그림자를 지우고자 ‘낭만’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한 것은 영리한 선택이다. 요즘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낭만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대가 전보다 더 많이 낭만을 말한다. 그들은 ‘낭만’을 이야기하기 위해 무려 목숨을 데려온다. ‘가을밤 즉흥 야장이라니, 이거 낭만 치사량 초과다’, ‘앙코르만 여섯 곡…어제 공연, 낭만 치사량 초과다’. 치사량 수준의 낭만이란 도대체 어떤 순간일까? ‘낭만 치사량 초과’의 순간을 살펴보면서 신비한 장면들을 기대한다. 내가 몰랐던 요즘의 낭만을 상상한다. 생명을 위협할 정도라니 얼마나 과감하고 용맹하며 비현실적이어야 할까?
기대와 달리 사람들이 ‘낭만 치사량 초과’로 명명하는 순간들은 거창하지 않았다. 비 오는 아침 손수 내린 커피의 향기,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온 가을밤, 낙엽 밟는 산책처럼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이 ‘치사량’일 정도다. 영리한 낭만은 늘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현실에 갇힌 우리를 구하러 온다. 알고리즘의 패턴에 갇혀 빠르고 효율적인 선택을 강요받는 지금, 이 시대에 낭만이 알려주는 저항의 방식은 ‘충만함’이다. 아주 잠깐도 괜찮다. 멀리 벗어날 용기가 없는 우리를 위해 잠시만 효율을 끄고, 감각을 켜 온몸으로 세상을 살아보는 것만으로도 생활에 낭만이 스민다.
낭만은 저항하는 거라고, 남이 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거라고 배웠다. 여전히 그런 식으로 펼쳐지는 낭만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발을 떼는 게 유난히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일상에서라도 찰나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낭만의 처방이 필요하다. 그건 내게 온 순간들을 온전히 들여다보고 사랑하는 힘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가진 최선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 내 눈앞에 있는 걸 가능한 한 많이 사랑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낭만이다. 그 쉬운 낭만을 자주 반복하면 내 낭만의 치사량이 조금은 더 늘어나지 않을까? 그런 실천으로 채워진 내 일상은 더 낭만적이진 않아도 전보다 사랑스러울 것은 분명하다.
■정유라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
정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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