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번역 데보라 스미스 "번역이란 아슬아슬한 줄타기"
2016년 '대산문화' 여름호 '채식주의자' 번역후기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한강 작가의 2024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그의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옮긴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에도 관심이 몰리고 있는 가운데, 번역 후기가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스미스 지난 2016년 교보생명 대산문화재단의 계간지 '대산문화' 여름호에 기고한 '채식주의자' 번역후기 '자극하고, 불편하게 만들고, 질문하고'를 통해 "한강은 이 소설이 독자들을 자극하고, 불편하게 만들고, 독자들로 하여금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을 모색하게끔 만들었다"며 "나 역시 내 번역이 영어권 독자들에게 그런 자극을 주기를 바랄 따름"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번역후기는 스미스가 한강 작가의 작품 메시지 전달을 위해 작가와의 공감대 및 독자들과의 소통을 위한 끊임없는 고민 속에서 '채식주의자' 번역 작업을 진행했음을 나타낸다. 그를 가리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일등공신'이라고 하는 이유다.
스미스는 "번역이란 번역인 동시에 해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자명한 이치라 쳐도, 이 자명함 뒤에는 번역에 관한 오해의 가능성이 도사린다"며 "번역은 '단 한 가지' 해석을 낳지 않으며, 혹은 그러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스미스에 따르면, 번역은 새로운 독자들에게 원문이 지닌 다수의 가능성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어야 하고, 동시에 번역된 작품을 접하는 새로운 독자들이 각자의 문화·정치적 프레임과 개개인의 인생과 독서 경험에 의해 틀 잡히고 결을 띠게 된 개별적인 주관에 따라 작품을 해석할 여지 또한 남겨주어야 한다.
그는 "번역가란 응당 ― 편집자와 표지 디자이너, 홍보마케팅 담당자와 마찬가지로 ―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며 "문화적 특수성을 문맥화하는 동시에 작품이 읽히고 수용되는 방법에 있어 과도한 방향 지시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서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같은 소설을 번역할 때면 이러한 줄타기는 더욱 중요해진다"며 "작가는 육식을 거부하면서 그 이유를 밝히지 않는 영혜라는 중심인물을 주변 인물들의 각기 다른 렌즈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영혜에게 극단적인 수동성을 부여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한강은 주인공이란 어떠해야 한다는 유럽 중심적 통념에 도전한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채식주의자'는 서로 천차만별로 나뉘는 해석에 기꺼이 몸을 내맡기는 작품이며, 이것이 국제적인 성공 요인이기 때문에, 번역가로서 이러한 점까지 그대로 전달하는 일에 대한 짙은 고민이 있었음을 토로했다.
스미스는 "다행히도 '채식주의자'는 사회학적 보고서보다는 음시(音詩)에 가까운 작품이고, 그만큼 원문에 '충실한' 번역가가 활용할 법한 문화적 특성에 뿌리내린 요소들 이외의 여타 요소들을 충분히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두면서도 이 소설의 영역본을 접하는 독자들이 (한글) 원서를 접한 독자들과 최대한 근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인가를 고민했으며, 한강 작가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특유의 분위기와 어조와 결이 하나의 정제된 이미지로 다가오는 경험을 '채식주의자'에서도 느꼈고, 이에 힘입어 각기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하나 된 독서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스미스는 작품을 문학보다는 사회인류학적 보고서로 읽어낼 가능성에 대해선 경계하는 마음이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독해는 자칫 작품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2015년 런던 북페어에서 한강을 페미니즘 계열 작가로 패널에 포함시킨 일을 사례로 들었다. 또한 번역가로서 작가의 의도를 최대한 존중하고자 원문의 효과를 영어 번역문에 재현하고자 적확한 문장 구조와 어휘를 찾기 위해 공을 들여야 했다고 밝혔다.
그는 번역에서 원문과 번역문이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과 항쟁을 상징하는) '오월의 신부'라는 표현을 영국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산타 마리아'로 번역하는 문제를 놓고 한강과 심사숙고한 일화도 공개했다. 또한, 인물 호칭에서는 한국의 유교적 위계질서와 관계성의 특성을 전달하기 위해 서양식으로 이름을 쓰지 않고 '처제의 남편'이라든가 '지우 어머니'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고 소개했다.
스미스는 작가와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의견을 주고받은 것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영혜의 언니 인혜가 말하는 "surely the dream isn’t all there is?"(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닌 거란 걸 알지)라는 대목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 문장에서 쓰인 'surely'는 확신을 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인혜가 스스로를 설득하고자 노력하는 인상을 주는 표현임을 설명해야 했다고 밝혔다.
스미스는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2010년부터 한국어를 독학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런던대학 동양아프리카대(SOAS)에서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당시 KF 해외 한국학 전공 대학원생 펠로(2013~2014)였다. 그는 '채식주의자' 번역 이후에도 다양한 한국 문학작품을 번역하고 있다. 또 아시아·아프리카 문학 번역서를 출판하는 '틸티드 악시스 프레스(Tilted Axis Press)'를 설립해 문학적 다양성을 넓히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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