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들이 만들던 게임산업, 직장으로서도 좋을까

최우영 기자 2024. 10. 1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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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인마켓]
게임 개발 앞두고 집중근로하는 '크런치모드' 52시간제 트렌드와 맞지 않아
워라밸 중시하는 풍조 퍼지면서 장기간근로 문제 국감에서도 지적
'996'으로 통칭되는 중국식 장시간 초과근무로 중국 게임산업 급속한 성장
[편집자주] 남녀노소 즐기는 게임, 이를 지탱하는 국내외 시장환경과 뒷이야기들을 다룹니다.

대한상의 2015년 '제2회 기업사진 공모전' 대상 수상작 '아빠는 야근 중'(회사원 이재학씨 출품작). /사진=대한상공회의소
과거 게임산업은 이른바 '주변부 산업'이었다. 게임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꿈을 가진 개발자들이 골방에 틀어박혀 밥도 잠도 잊은 채 몇 달씩 타이틀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게 다반사였다. 개발비용을 확보하려고 외주를 따오는가 하면, 한게임을 만든 김범수는 아예 PC방을 차려서 가게 한 켠에서 무리지어 코딩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헝그리 정신'으로 다져진 한국 게임산업이 두각을 드러내면서 자연스레 임직원 급여도 삼성, LG 등 기존 대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런데 아직 다른 대기업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장기간 집중근로다. 만성적인 장기간 근로에 지친 MZ세대 게임사 직원들의 성토가 직장인 익명 게시판 등에서 이어지고 있다.
판교의 등대, 구로의 등대
게임은 초반 흥행이 모든 것을 가른다. 출시 직후 유입된 유저를 유지하고, 유저 평가를 후하게 받지 못한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 음원 차트의 유행가처럼 '역주행'하는 사례를 찾기 드물다. 그래서 모든 게임사들은 출시 직전 수개월간 사활을 걸고 끊임 없이 게임을 다듬는다.

이때 밥먹듯이 야근을 하는 풍조를 '크런치 모드'라고 한다. 한국 외의 다른 나라도 사정은 비슷해, 일본에서는 연일 이어지는 게임사의 야근 풍토를 '데스마(데스마치, 죽음의 행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야근이 벌어지면 주변 건물들이 어둠에 쌓인 야경 속에서 게임사의 고층 건물만 환하게 빛을 밝힌다. 넷마블이 '구로의 등대'로, 위메이드가 '판교의 등대'로 불리게 된 건 과거 만성적인 야근을 일삼아온 탓으로 알려졌다. 바닷가의 등대가 어둠 속에서 선박들에게 길을 알려주는 희망의 상징이었다면, 게임업계의 등대는 밤에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개발자들의 애환이 담긴 표현인 셈이다.
게임 대박나면 임직원도 '잭팟'
/삽화=김현정 디자인기자
그동안 게임사들은 장기간 근로에 상응하는 성과연동 보상제로 직원들의 불만을 잠재워 왔다. 게임이 흥행에 성공하면 고액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이는 다시 힘내서 주말과 야간에 일을 할 수 있는 동력이 되는 셈이다.

넷마블은 2017냔 핵심 개발자 100여명에게 120억원에 달하는 성과급을 지급해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시프트업은 지난해 '승리의 여신: 니케'의 흥행 이후 전 직원에게 신형 아이폰과 1500만원의 성과급을 지급했다. 올해 크래프톤과 넥슨게임즈에서도 임원이 아닌 일반 직원이 상반기에만 10억원 안팎의 급여를 받으며 연봉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크런치 모드가 고되고 힘들지만 참고 버티는 이유는 게임이 성공할 경우의 보상이 다른 기업들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이다"며 "쉴 때 다 쉬어가면서 남들보다 뛰어난 게임을 만든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고 전했다.
'워라밸' 중시하는 요즘 게임사 MZ들
올해 5월 출범한 넷마블 노동조합. /사진=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최근에는 게임사들의 만성적 초과근로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게임업체들이 처우 측면에서 '좋은 직장'으로 알려진 뒤 입사한 젊은 직원들에 의해서다. '워라밸(일과 직업의 균형)'을 추구하는 이들은, 과거 밤샘과 사무실 내 간이 침대를 당연하게 여기던 과거 개발자들과 결이 다르다.
한 게임사 개발본부장은 "20여년 전 입사하던 직원들은 대부분 게임에 미친 사람들이었다"며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열악하고 처우도 나쁜 상황에서 게임만 바라보고 입사한 것"이라고 돌아봤다. 또 "최근에는 게임을 많이 좋아하지 않거나, 심지어 게임을 잘 모르는 직원들까지 입사하고 있다"며 "게임에 미친 사람들만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요즘엔 게임사를 '좋은 판교 직장' 정도로만 생각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전했다.
초과 근로시간 체크도 하지 않는 '포괄임금제' 손보나
지난달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안호영 환노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워라밸' 직원들이 가장 비판하는 것은 게임사들에 퍼져있는 포괄임금제다. 포괄임금제는 연장·휴일근로 수당을 총 연봉에 포함해 계약하는 제도로, 실제 초과근로와 상관 없이 수당을 정액으로 책정한다. 사실 근로기준법상 개념은 아니지만, 대법원 판례에는 존재한다.

포괄임금제는 근로시간 측정이 어려운 경우 노사의 합의를 통해 적용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수당 측정방식의 간편하기 때문에 근로시간이 명확한 사무직 등에도 널리 쓰인다. 게임사 역시 출퇴근 시간을 측정하기 쉬운 근로방식이지만 포괄임금제 관습이 공기처럼 만연하다. 이를 사용자가 '공짜노동' '무제한노동'에 악용한다는 게 젊은 직원들의 불만이다.

게임업계에서 포괄임금제에 대한 불만이 늘어나자 국회에서도 이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는 2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종합 국정감사에는 김창한 크래프톤 대표가 증인으로 나와 포괄임금제에 대한 질의응답을 진행한다. 2019년 고용노동부가 장시간·휴일 근로 등이 만연하다며 포괄임금제 시정 지시를 했지만 이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어서다.
'996' 살인적 근무환경의 중국 게임사들의 약진
마윈 알리바바그룹 회장. /사진=이동훈 기자 photoguy@
일각에서는 이 같은 초과근무 제한이 게임사의 경쟁력을 약화시틸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들은 중국 게임삼들이 최근 '검은 신화: 오공' 등 글로벌 흥행작을 내놓고, 한국의 앱마켓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는 배경으로 한국 '크런치 모드'를 뛰어넘는 중국의 '996'을 꼽기도 한다.

996은 중국 IT업계에서 통용되는 말로,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주 6일 일한다는 뜻이다. 중국 역시 주 44시간 근로제를 법으로 정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게임업체들은 벌금만 내고 이를 무시하거나, 지방정부와 유착해 근로감독을 피하는 실정이다.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은 2021년 "996을 할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젊을 때 996을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느냐"며 이를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996을 전면 적용하는 중국 게임업체들이 당장은 완성도 높은 게임을 만들 수 있겠지만, 중국 업계 내에서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996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며 "업무에 대한 열정과 직원 처우, 회사의 성과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것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여전한 숙제로 남아있다"고 바라봤다.


최우영 기자 you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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