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천재도 사기꾼 앞에선...거품 회사에 투자했다가 77억원 날린 사연은 [히코노미]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10. 1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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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노미-6] 저택에 화려한 정원, 분숫가에 앉아 편안하게 공부하는 안락한 삶. 그가 평생을 꿈꿔왔던 장면이 곧 현실로 다가오는 듯 했습니다. 투자한 주식이 대박을 앞뒀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리학에 매료돼 공부에 푹 빠져 산 지 어언 60년. 진리를 탐구한 그에게 신께서 선물을 내리려 했던 것이었을까요. 학문도 투자도 모두 성공한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오늘도 상한가야.” 네덜란드 화가 피터 콰스트의 즐거운 파티.
화창한 아침, 그러나 시내는 분노와 절규로 부산합니다. 어제만 해도 환희에 젖어 있던 투자자들의 외침입니다. 거짓말처럼 폭락한 주식 소식을 듣고 찾아온 군중들. 폭락을 부정하던 투자자들. 그 속에는 어젯밤까지 가슴 벅찬 채 잠이 들었던 물리학자도 있었습니다.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투자한 주식회사는 모든 거짓 정보 위에 세워진 모래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의 이름은 ‘사우스시 컴퍼니(South Sea Company·남해 주식회사)’. 허상에 빠져 결국 전 재산을 날린 투자자의 이름은 아이작 뉴턴이었습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인류의 지성인 그조차도 ‘대박’이라는 꾀임에는 까막눈이었습니다. “중력은 계산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었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주식투자로 전 재산을 날린 이야기는 어리석은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인류 최고의 지성 아이작 뉴턴도 그랬기 때문이다. 아이작 뉴턴의 초상화. 고프리 넬러의 1689년 작품.
오늘날 본질적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 주식 가격에 ‘거품’(버블)이라는 관용구가 붙은 것도 이 사건 직후였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사건 이후 잉글랜드는 세계적 금융 강국으로 거듭납니다. 경제사에서는 절대 작지 않은 의미를 남긴 사건인 셈이지요. 사우스시 버품붕괴 사건을 돌아봅니다. 버블은 언제나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잉글랜드, 네덜란드의 금융혁신을 이식하다
“갓, 세이브 더 킹 앤 퀸”(신이시여, 왕과 여왕을 구원하소서)

1688년 잉글랜드에 일대 격변이 일어납니다. 왕 제임스 2세가 신하들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나면서였습니다. 개신교 국가인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2세가 가톨릭을 옹호하는 정책이 화를 일으킨 것이었지요.

새로 옹립한 왕은 같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의 지배자 윌리엄과 그의 아내 메리였습니다. 제 나라 폭군의 폭정을 견디지 못해 외국의 지배자를 수입해온 셈이었지요. 완전한 외국인을 모셔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의 또 다른 정체성은 제임스 2세의 사위와 딸. 제임스 2세는 워낙 인기가 없는 왕이었기에 큰 소란 없이 부드럽게 정권이 교체됩니다. ‘명예혁명’이라고도 불리는 배경입니다. 메리2세와 윌리엄3세의 공동통치가 막을 올렸습니다.

“우리가 이제 잉글랜드의 통치자입니다. ” 윌리엄3세와 메리2세. 제임스 손힐의 그림.
명예혁명은 ‘금융혁명’이기도 했습니다.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가장 잘 갖춰진 나라 네덜란드 군주가 잉글랜드를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의 금융 체계가 영국에 이식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네덜란드에만 존재하던 증권거래소와 중앙은행이 영국에 등장한 배경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주식회사의 주식은 창고에서 경매될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윌리엄 3세 통치 이후 뱅크오브잉글랜드 설립(1694년), 약속어음에 관한 법 제정(1704년)이 모두 이뤄졌습니다. 현재 세계 금융의 수도인 런던은 네덜란드 군주로부터 그 첫발을 뗀 셈입니다.

“이게 그 선진 네덜란드에서 들어온 시스템이래.” 1694년 영국은행 헌장을 작성하고 이를 봉인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금융혁신으로 성장하는 잉글랜드
도로가 닦이면 차가 늘어나듯, 금융이라는 비단길 위에는 자본가들이 올라섭니다. 1690년대 영국은 ‘Monyed Man’(자본가)의 시대로 불립니다. 은행가이자 동인도회사의 주주로서 큰돈을 번 조사이아 차일드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당시 금욕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교회는 이런 자본가들의 허영과 야만을 비판했지만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응수합니다. “인간은 이윤을 좇는 존재”라고 말이지요.

제임스 브리지스나 찬도스 백작 같은 이들도 큰 부를 일군 인물로 이름난 사람들입니다. 탐욕과 소비가 경제적 미덕이라는 자유주의의 살아있는 상징들이었지요. 이들은 ‘꿀벌의 우화’를 쓴 버너드 맨드빌의 명언을 가슴에 새긴 채 살아갑니다. “탐욕, 낭비, 자만, 사치와 같은 개인적인 악덕은 사회에 이롭다”.

개인이 탐욕적일수록 사회에 이득이 된다고 주장한 버나드 멘드빌의 초상화.
윌리엄 3세 통치기 잉글랜드 상업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합니다. 항구에는 매일같이 거대한 함선이 들어와 세계 각지의 아름다운 물건들을 내려놓고 다시 항해를 떠나기 바빴습니다.

금융의 달인인 이주 네덜란드인들은 영국 경제를 금빛으로 바꿔놓은 일등 공신이었지요. 회사의 가치는 치솟았고, 더 많은 사람들은 주가를 거래하기를 원했습니다. 잉글랜드 증권거래소인 익스체인지 앨리의 시작이었습니다. 옵션 투자와 같은 선진 투자 기법도 네덜란드에서 수입되기에 이르렀지요.

주식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지던 익스체인지 앨리를 묘사한 19세기 그림
프랑스 대표 회사 미시시피...잉글랜드도 반격에 나서다
‘주식회사 잉글랜드’는 언제나 상한가였습니다. 1710년에는 영국 최초의 보험회사 선 파이어가 주식 투자 붐을 이끌었습니다. 잉글랜드는 그러나 아직 배가 고팠습니다.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걸출한 회사가 나라 전체를 부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시시피 주식회사’(히코노미 4화 참조)였습니다.

프랑스가 어떤 나라입니까. 수백 년 된 영국의 앙숙이요, 체스게임이라도 져서는 안 될 숙적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정부의 가장 큰 목표는 단 하나. ‘미시시피 회사’를 능가하는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 ‘사우스시 컴퍼니’의 등장이었습니다.

“이곳이 영국 무역의 중심 사우스시 컴퍼니입니다.” 런던 비숍스게이트에 마련된 사우스시 컴퍼니 본사.
사우스시 컴퍼니의 기본 구조는 ‘미시시피 회사’와 같았습니다. 남아메리카 지역의 무역 독점권을 보유한 조직으로 잉글랜드 국채 보유자들에게 회사 주식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합니다. 영국 정부로서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대북방전쟁으로 쌓인 빚을 털어버릴 기회였고, 시민들은 유망한 회사의 주식을 보유할 찬스였습니다.

모든 투자자들이 장밋빛 전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주가가 하루가 다르게 치솟으면서였습니다.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모두가 사우스시에 투자합니다. 물리학자 뉴턴도, 시인 알렉산더 포프도 대박의 열기에 휩싸인 인물이었습니다. 포프가 주식 브로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저는 국채의 주식전환에 관한 이야기를 매일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열망에 너무나 들떠 있습니다.” 시인도 물리학자도 일확천금 앞에서는 속물이나 진배 없었습니다.

주식 거래소는 사우스시 주식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다니엘 디포(‘로빈슨 크루소’ 저자)는 그 때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익스체인지 앨리에는 한몫잡기 위해 영국 전역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우글거린다.”

사우스시 컴퍼니의 문장(Cooat of arms). 왼쪽 상단에는 영국 왕실 문양이 아래쪽에는 그들이 무역하는 아메리카 지도가 그려져 있다. 청어는 대표적인 무역상품을 의미한다. [사진출처=most epic]
사우스시 컴퍼니의 실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가를 끌어올리는 게 회사의 이익을 위해 좋은 일.”

사우스시는 그러나 대중의 믿음과는 달리 건실한 회사가 아니었습니다. 회사를 이끄는 존 블런트는 내실보다는 주가만 쳐다보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천재적인 방법으로 사우스시 주식에 대한 수요를 끌어올렸습니다.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번 수익은 얼마였지.” 사우스시 하우스의 홀. 1810년.
오늘날로 치면 엔비디아를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엔비디아가 직접 돈을 빌려주고 주식을 사게끔 유도하는 셈입니다. 수요 폭증은 예정된 일. ‘돈 없어도 사우스시 주식을 살 수 있다’는 문구 하나가 미친 파급력은 어마어마 했습니다.

잉글랜드에 있는 모든 빈자들 역시 본인들의 비루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너도나도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주가는 폭등했지요. 한 달 사이에 80% 가까이 올랐습니다. 황당한 사업계획과 빈약한 매출에도 투자자들은 눈을 감았습니다.

정치가 부패의 뒷배경이었다
거품이 낀 회사 뒤에는 언제나 정치적 배경이 있기 마련입니다. 존 블런트는 의원들과 장관의 몫을 언제나 남겨 놓습니다. 정경이 유착할 때 그 이익이 폭등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원들은 주식을 우선 배정 받았고, 뇌물을 받아 챙긴 의원들은 2배 이상의 시세 차익을 맛봤습니다.

상원의원인 허치슨은 국채를 사우스시 주식으로 전환하는 계획에 대해서 “수많은 가정을 파멸로부터 보호해야하는 것이 상원의원의 의무”라고 일갈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180파운드에서 시작한 사우스시 주가는 어느덧 1000파운드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1720년 국왕 조지1세도 이 주식 청약에 참여했습니다. 런던의 모든 사람이 외칩니다. “롱 리브 킹, 롱 리브 사우스시”(영원하라 왕이여, 사우스시여).

“자 이거 사면 당신들도 부자가 될 수 있다네.” 19세기 중반 화가 에드워드 메튜 워드가 그린 ‘사우스시 버블’. 사건 발생 100년 뒤에도 그림으로 그려질 정도로 영국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었다.
시장 저잣거리에서마저 주식 이야기가 나올 때는 언제나 매도 시점이라는 우스갯소리, 동서고금의 진리인가 봅니다. 런던의 모든 사람들이 사우스시 주식이라는 광품에 사로잡히는 즈음해서 조금씩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본업(本業)인 라틴아메리카와의 독점 무역에서 별다른 수익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졌었습니다. 정보는 언제나 비대칭적이고, 그 피해는 시민의 몫입니다.

‘사우스시’라는 바다에는 물과 고기가 없었습니다. 오직 거품만이 가득합니다. 주가 폭락은 수순이었습니다. 1000파운드에 달하던 주가는 이제 100파운드로 떨어집니다. 며칠 만에 10분의 1토막이 난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대표적 화가 윌리엄 호가스가 그린 사우스시 계획에 대한 상징적 판화. 놀이기구 위에는 Who‘ll ride(누가 탈것인가) 라고 새겨져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이 깔려 죽어있다. 주식 투기의 위험성을 풍자한 모습이다.
주가가 폭락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전 재산을 날린 시민들이 의회에 찾아가 구원을 원했지만 묘수는 없었습니다. 폭도로 변한 군중들은 영국 정치의 중심지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난입해 칼을 휘둘렀습니다.

성경에서나 묘사되는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사우스시’라는 파도가 잉글랜드를 강타합니다. “모든 질병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 환상 속에 빠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태가 우리 눈앞에 와 있다.” 다니엘 디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잉글랜드 조폐공사 사장으로 일하고 있던 뉴턴 역시 이때 모든 재산을 날렸습니다. 오늘날의 가치로 77억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습니다. 부를 향한 욕심 앞에서는 그의 빛나는 지성도 무용지물이었습니다. 마침 라이벌 프랑스에서도 미시시피 회사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전 유럽을 뒤흔든 금융 위기였습니다.

“별의 움직임보다 인간의 탐욕이 계산하기 더 어렵더군.” 1712년 노년의 아이작 뉴턴. 제임스 손힐의 작품.
그러나 그들은 위기에서 진화했다
“영국의 금융을, 더 나아가 경제를 구해야 한다.”

국격은 번영이 아닌 위기에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미시시피 회사가 무너진 후 프랑스는 휘청거렸지만, 잉글랜드는 달랐습니다. 품격있는 지도자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등판했기 때문입니다. 새로 임명된 재무부 장관 로버트 월풀이었습니다.

그는 입각하자마자 책임자에 대한 조사에 나섰습니다. 사우스시의 부패에 눈감아준 유력 정치인들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았습니다. 전임 재무장관 존 아이슬라비를 비롯해 고위 관료 여럿이 탄핵당합니다. 광분한 투자자를 진정시키기 위한 제물로 충분한 인물들이었지요.

“자 사우스시 버블 부패 책임자를 모두 엄벌하라. ” 재무장관 로버트 월풀은 사우스시 버블 사태를 해결한 정치인이었다.
주식 폭락으로 완전히 얼어붙은 경제에 활력을 돌리기 위해서 영란은행을 적극 활용합니다. 필요한 곳에 돈을 공급하고, 살려야 할 기업은 살리는 작업. 냉철하지만, 때론 잔인하게. 선비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모두 겸비한 접근이었지요.

거친 말처럼 뛰놀던 기업들에겐 재갈을 물렸습니다. 1720년에 통과된 버블법(Bubble Act)이었습니다. 기업이 허위성 정보를 기반으로 주식을 발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법안이었습니다. 경제사상 기업에게 규제를 가한 첫 번째 법안이기도 했었지요.

영국 화가 조셉 라이트의 ‘오레리에서 강의하는 철학자’. 산업혁명의 정신을 구현한 작품으로 통한다.
기업의 투명성과 금융시장의 건전성 없이는 자본 시장이 성장할 수 없다는 걸 잘아서였습니다. 선명한 금융시스템 속에서 잉글랜드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로버트 월풀은 사태 수습의 공을 인정받아 잉글랜드 역사상 첫 총리(Prime Minister) 자리에 오릅니다.

18세기 후반 증기기관의 혁명적 발전은 잉글랜드를 산업 부국으로 이끌었습니다. 사우스시의 거품을 내실로 가득한 풍요의 바다로 만든 건 잉글랜드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미시시피 회사 거품의 직격탄을 맞은 프랑스는 1787년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집니다. 프랑스에는 월풀이라는 위대한 정치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때로 국가의 명운을 가릅니다.

대영제국의 기틀을 닦은 로열 익스체인지. 이곳에서 수 많은 주식이 그보다 더 큰 욕망이 거래됐다. [사진출처=디에고 델소]
<네줄요약>

ㅇ18세기 초 잉글랜드는 사우스시 회사라는 독점 무역권을 가진 회사를 설립하고 국채를 가진 투자자들이 주식을 가질 수 있게 했다.

ㅇ장밋빛 전망이 가득하면서 잉글랜드 전역에 주식을 사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이작 뉴턴도 그 중 하나였다.

ㅇ수익에 대한 거품이 드러나자 주식은 10분의 1로 폭락했다.

ㅇ그러나 월풀이라는 위대한 정치인이 책임자를 처벌하고, 금융시장을 안정화시키면서 다시 잉글랜드는 금융중심지로 거듭났다.

<참고문헌>

ㅇ에드워트 챈슬러, 금융투기의 역사, 국일증권경제연구소, 2001년

‘경제’는 맛보기에 어려운 식재료입니다. 채권, 이자, 화폐라는 단어만 들어도 쓴맛이 올라옵니다. 맛있게 즐기려면 ‘역사’라는 양념이 필요합니다. 히스토리와 경제를 결합한 연재물 ‘히코노미’는 먹음직한 요리를 내는 걸 목표로 합니다. 격주로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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