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품격이 이용자 만족 좌우’ 소신…호텔에 첫 납품 [ESC]
제주 특급호텔의 제작 주문 받아
시행착오 끝에…“무에서 유 창조”
정성껏 빚은 물건 배송 ‘시원섭섭’
폭염이었다. 사람도, 시간도 녹아내리던 어느 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안녕하세요, ㅇㅇ호텔 구매부입니다.” 네? 제주도에 비교적 최근 오픈한 특급호텔이었다. 얼마 전에는 제주를 방문한 장모님을 모시고 가족식사를 하기도 했던 곳이다. 객실에서 사용할 원목 트레이를 주문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런데 좀 까다로운 문제가 있기는 한데요….” 말끝을 흐리는 담당자를 만나 함께 현장을 확인했다.
객실 중에서도 고급 객실이었다. 테라스 문을 열고 나가면 야외에 커다란 편백나무 욕조가 있었다. 노천탕이었다. 찬란한 오전의 햇살이 제주의 정취를 담은 현무암 돌담에 머물렀고, 그 너머에선 바다가 밀어내는 잔잔한 파도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과연, 이 정도는 되어야 제대로 된 노천탕이다. 이런 공간 속에서 즐기는 노천욕이라는 호사를 한번쯤 누려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실용적이며 아름답게…말은 쉽지만
발주 내용은 이랬다. 원형의 욕조에 사각형의 트레이를 거치하고 각종 편의용품 등을 배치하겠다는 계획이다. 와인이나 맥주 등의 음료도 즐길 수 있기를 원했다. 처지지 않으면서, 상당한 무게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트레이를 거치한 상태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욕조 뚜껑까지 덮을 수 있어야 했다. 기존의 욕조와 색감도 튀지 않아야 하고, 심미적 측면을 고려하면 너무 둔해 보이거나 복잡한 구조는 피해야 했다. 이름하여 ‘욕조 거치형 편백 트레이’다.
그런 용도라면 차라리 협탁을 고려해 보자고 제안했지만, 발주처의 내부 논의 결과 ‘거치형 트레이’로 다시 결정됐다. 정면돌파 외엔 답이 없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객실은 10곳이고, 하나의 욕조당 두 개의 트레이를 걸어내야 했다. 대략 5㎝ 두께의 편백 원목으로 제작되어 있는 10점의 원형 욕조는 모두 미세하게 규격이 다를 것이 분명했다. 짜맞추듯 정교하면 안 되고, 제각각 덜렁거릴만큼 느슨해도 안 된다는 거다. 건설 현장에선 ‘파이값’이라는 용어를 쓴다. 더 정확한 우리말로는 ‘곡률(선 또는 공간의 굽은 정도를 표시하는 수치)’이다. 욕조 10개의 ‘곡률’에 각각 따로 맞춰 트레이 거치대를 재단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므로, 그 ‘느슨한 정교함’의 틈 사이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물건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이건 어렵다. 머리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가슴은 두근거렸다. 공예장을 지향하는 소목수로서의 자존심도 고개를 쳐들었다. 꼭 매출 측면이 아니더라도, 창업 2년 만에 특급호텔에 납품할 수 있는 공방이 될 수 있다는 건 꽤나 근사한 일이 아닌가. 일단 샘플 제작을 해보겠다고 했다. 다행히 주어진 시간은 많았다. 몇 달 안에 납품하면 되는 일이었다.
기나긴 고민의 시간은, 그 날부터 시작됐다. 트레이 자체의 규격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트레이를 거치하는 방식만 풀어내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첫 번째 샘플은 처참한 실패작이었다.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어렵지만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는데, 일단 가장 중요한 기능인 ‘견고한 지지력’이라는 측면에서 낙제였다. 여러 관계자들과 함께 현장에 거치해 보았는데, 기대와는 다른 결과 앞에서 등줄기에 땀이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업력이 두터운 다른 업체를 제쳐두고 신생 공방인 내게 연락을 취해준 담당자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졌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설계도면을 그리는 프로그램과 드로잉 노트를 동시에 열어 놓고, 수많은 디자인을 그렸다 버리는 일을 거듭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여정은 분명 흥미로웠지만, 동시에 고통스럽기도 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두 번째 샘플은 성공적이었다. 여러 문제점을 보완하면서도 최대한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고 싶었다. 실용적이면서 아름다운 물건. 말은 쉽지만 실행은 어렵다.
거치를 위한 스테인리스 철물은 육지 업체에 주문해 특별히 제작했다. 디자인에 자신이 있었기에, 납품을 위한 20세트의 물량만큼의 철물을 한 번에 발주했다. 철물 주문제작은 비싸다. 어차피 소량만 제작해도 비용은 비슷할 터였다. 가져가기 전에 공방에서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 무거운 공구를 올려놓아도 처지는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시 현장에서 샘플을 테스트하고 시안이 통과되었을 때, 정말로 순수하게 기뻤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물건을 함께 확인한 다른 관계자의 평가였다. 본 작업은 이제야 시작될 터였지만, 그 동안의 노력이 벌써 보상을 받는 듯 들떴다. 조금 부끄럽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혼자 콧노래도 불렀다.
디테일이 가르는 물건의 가치
20세트의 거치형 트레이를 제작하는 본 작업은 시간도 오래 걸렸고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했다. 육아와 살림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3차례의 야근을 감행한 것도 나름 큰 투자였다. 조용한 공방 문을 열고 장비를 돌리는 밤에는 기분이 묘했다. 아내도 퇴근 후 육아를 도맡으며 든든한 응원을 보내줬다.
원했던 1㎝ 두께의 편백 판재를 제주에선 구할 수 없어서 직접 집성(나무를 원하는 형태와 규격으로 접착하는 과정)해 바닥판을 만들었다. 디테일의 완성도가 물건의 가치를 가른다. 트레이는 못을 쓰지 않고, 결구가 밖에선 드러나지 않도록 짜맞춤 방식으로 제작했다. 구상과 디자인에만 2달, 실제 제작에는 3주 정도가 걸렸다. 오일마감을 마친 20세트의 트레이를 포장해 납품하는 날에는 기분이 묘했다. 마감하고 물건을 배송하고 나면 항상 비슷한 감정이 밀려온다. 더 잘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든다. 오랫동안 내 손으로 매만지며 다듬은 물건을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시원섭섭함이 공존하는 것이다.
나무를 만지며 가구와 소품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공간의 품격’이 곧 그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의 ‘경험의 질’을 규정한다고 믿는다. 그런 품격에 걸맞은 물건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건 어떤 작업에서나 붙들고 있어야 하는 소목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끝날 것 같지 않은 폭염 속에서 시작한 작업이 마무리되자 느닷없이 선선한 가을이었다. 서귀포의 작은 목공방도, 아주 조금은 성장했다.
글·사진 송호균 나무공방 쉐돈 대표
한겨레 기자로 일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생각해 2016년 온 가족이 제주도로 이주했다. 본업은 육아와 가사였는데, 취미로 시작한 목공에 빠져 서귀포에서 목공방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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