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그랜드 투어와 명승 유람
(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그랜드 투어(Grand Tour)'는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예술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다.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귀족 자제들 다른 나라 여행을 말하는데, 주로 고대문화를 꽃피운 그리스와 로마, 르네상스가 발흥한 피렌체, 베네치아 등으로 떠난 장기 여행이었다. 엘리트 귀족들 필수 교양 과정으로 자리 잡았다.
영국 이외 다른 나라로 번졌는데, 독일 대문호 요한 볼프강 괴테(1749~1832)가 쓴 '이탈리아 기행'(1829)이 대표적인 문학적 성과다.
그랜드 투어는 유럽 각 나라 문화가 교류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미술에선 한 '스타 화가'를 탄생시켰다.
베네치아 출신 안토니오 카날레토(1697-1768)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베네치아 곳곳을 묘사한 풍경화였는데,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오늘날 기념사진이나 엽서 사가듯이 그의 그림을 구매했다. 이런 그림을 '베두타(Veduta)'라고 불렀다. '경치'나 '전망'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다.
덕분에 카날레토 이후 프란체스코 구아르디(1712~1793)도 큰돈을 벌며 유명해졌다. 유럽이나 미국 내 어떤 미술관에 가더라도 이들이 그린 베네치아 풍경화는 '반드시'라고 할 만큼 전시돼 있다.
이들 그림은 왜 그렇게 인기를 끌었을까? 세밀하게 그린 사실적인 풍경화였던 덕이다. 베네치아 경관은 유럽 내에서도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장소로 여겨졌다. 서유럽에 비해 상쾌한 대기도 매력을 더해준 곳이었다.
베네치아 풍경화는 다녀온 사람들에겐 추억을, 다녀오지 않은 이들에겐 동경을 베푸는 '낭만과 미지(未知)'로 작용했다.
시대의 요청이었을까? 비슷한 시기, 조선에도 같은 유행이 번졌다. 문인 사대부들 '명승 유람'이었다. 특히 화가들은 자신의 여정을 그림으로 남겼으므로 유람 행적이 잘 남아 있다.
'진경산수화'를 발전시킨 정선(1676~1759)부터 정조 명령에 따라 명승지를 기록한 도화서 화원 김홍도(1745~1806?), 중인 출신 기인 화가로 산천을 떠돌다 길 위에서 생을 마친 최북(1712~1760),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여행가로 변신해 금강산을 네 번이나 오를 정도로 평생 산하를 밟은 정란(1725~1791) 등이다.
명승지 그림이 성장한 건 이전에 등장한 기행문학 영향이었는데, 대표적인 저작은 정철(1536~1594)이 쓴 '관동별곡'(1580)이었다.
중국 신화부터 중국 고사와 인물들을 사모하던 전통이 서서히 깨지며 우리 산천을 사유의 대상으로 살피게 됐다. '진경산수화'가 표방한 정신이다.
이런 유람도 명나라 때 번진 산수 여행을 따른 것으로 중국의 유행 아래 놓인 것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우리 것'을 보듬었던 노력마저 깎아내릴 수는 없다. 이들이 남긴 명화를 통해 오늘날에도 당시 우리 자연 경관이 손짓하는 미감에 몰입할 수 있으니 대단한 유산임은 틀림없다.
유럽 그랜드 투어가 '외부 지향'이었다면, 조선 명승 유람은 '내부 탐색'이었다. 이는 조선의 한계였다. 청나라에 대해선 '오랑캐 나라'라는 인식, 일본은 '미개한 나라'라는 인식 등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떨치지 못한 탓에 외국으로 나가는 건 드물었다. '열하일기'와 '북학의'를 각각 쓴 박지원과 박제가 등 소수만이 예외였다.
그랜드 투어가 쇠퇴한 가장 큰 이유는 기차의 등장, 즉 '길의 확장'이었다. 명승 유람이 모습을 감춘 건 천주교 등 외국 문물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쇄국', 즉 '길의 폐쇄'였다.
외부로 향한 유럽인들 눈은 새로운 길을 개척했으나, 내부에 머문 조선인들 눈은 있던 길마저 끊었다. 물질문명과 자연과학이 '이기(利器)'를 넘어 '이기(利己)'라는 부작용을 드러냈지만, 조선의 폐쇄는 망국으로 향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어딜 가나 만날 수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인은 개방과 포용의 새 지평을 여는 '거객(巨客. Grand)'과 '명인(名人. 名勝)'이 될 것으로 믿는다.
doh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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