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햇빛을 받는 마을… 만년필에 바닷물을 담다 [강동삼의 벅차오름]

강동삼 2024. 10. 12. 08: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 성산일출봉과 그 햇빛을 가장 먼저 받는 마을 오조리에서 바라보는 바우오름과 저 멀리 성산일출봉. 제주 강동삼 기자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흰’ 파도를 닮은… 햇빛을 가장 먼저 받는 마을 ‘오조리’

4·3의 아픔을 그린 최근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프랑스 메디치외국문학상 수상), 채식주의자(영국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의 작가 한강이 2024년 10월 10일,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인들 모두가 놀랐다. 작가 역시 이날 저녁 노벨문학상 수상자 통보 전화를 받고 “다른 날처럼 보낸 뒤 막 아들과 저녁을 마쳤다”라고 말했다. 담백한 소감이었지만, 그는 “놀랐고 영광스럽다”고 고백했다. 어쩌면 그의 소설 ‘흰’처럼 하얗게 웃었을지 모른다.

스웨덴 한림원은 2024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에 대해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평가했다. 작가의 자전적인 작품 ‘흰’은 그가 내놓은 강렬한 시적 운문이 돋보이는 소설 중 하나이다. 하얀(흰) 이미지로 그려내는 죽음은 소설이라기보다 시에 가깝다. 문장들이 모두 아릿하다.

시 같은 소설 ‘흰’ 목록에서 가장 시적인 산문으로 넘치는 목록이 ‘당신의 눈’이다.

‘당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 나는 다르게 보았다. 당신의 몸으로 걸을 때 나는 다르게 걸었다.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42> 바우오름과 성산일출봉

당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 나는 당신에게 가장 바다에 가까운 마을이면서 가장 태양을 먼저 마주하는 마을 ‘오조리’를 보여주고 싶다.

연중 일출을 감상할 수 있게 된 성산일출봉 앞,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 성산일출봉이라면, 그 햇빛을 가장 먼저 받는 마을이 오조리이기 때문이다.

아침이면 태양이 내수면에 드러눕고, 저녁이면 하얀 달이 내수면을 내려다보는 곳. 오조(吾照)는 ‘나를 비춘다’는 뜻을 지닌 것도 다 내수면 덕분이다. 한강은 ‘흰’ 목록 ‘파도’에서 ‘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고 표현했듯이, 오조리마을 바다 위를 걸으면 파도가 눈부시게 희다. 푸른 물결은 사라진 듯 하다. 찬란한 햇빛이 보석처럼 빛나기 때문이다.

오조리마을 내수면과 뚝. 제주 강동삼 기자
바우오름 오르다가 만난 성산일출봉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철새들의 낙원 연안습지보호구역 물 위를 걷다… 올레길 2코스 오밀조밀한 마을올레길을 걷다

마치 바닷물을 가두어 생긴 호수처럼 느껴지나 오조리 내수면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성산일출봉이 분화하면서 터져 나온 크고 작은 파편이 둥그렇게 둑을 형성해 만이 생겼다. 이곳에 바닷물이 괴어 물고기가 제법 드나들었고, 1960년에 마을공동체 사업으로 양어장을 구축하면서 돌을 쌓아 만든 둑을 줄지어 놓았다. 제주 어디에도 이런 마을은 없을 것이다.

오조리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개발을 제한해 고스란히 제주의 평온한 마을길을 지켜내고 있었다. 올레길 2코스를 알리는 간세표시를 지나 갯벌같은 바다 위를 걷는 목재 데크를 지나면 아스팔드 길바닥에 ‘올레길’이라고 크게 쓰여 있는 화살표를 따라 걷는다.

앞서 용천수 족지물을 만났다. 위쪽은 여탕, 아랫쪽은 남탕으로 구분 사용했으며 맨 위쪽은 채소를 씻기도 하고 음용수로도 사용했다고 쓰여 있다.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주변에 조성된 동네이름도 족지동네다. 제주도에서 네번째로 용천수가 풍부한 마을 오조리에는 족지물을 비롯해 진모살물, 수전, 주근디물, 엉물, 샛통물 등 12개의 물통(용천수)이 있었다.

오조리는 지난해 12월 22일 해수부가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내수면 연안습지 0.24㎢의 면적을 연안습지 보호구역으로 공식 지정했다. 멸종위기 철새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식지가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제주 최초 사례다.

오조리는 어쩌면 철새들의 낙원 이미지가 더 강해지고 있다. 산책하다 보면 새들이 바다호숫가에서 퍼드득 날아 갯바위 혹은 물위에서 노닌다. 얼마전에는 습지보호구역(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오조리 갯벌을 알리기 위해 ‘갯것이 영화제’가 열려 주목받았다. 바다를 주제로 한 단편영화 6편이 갯벌에서 상영됐다.

오조리연안습지는 육지와 섬 사이를 연결하는 육계사주로 만이 형성되면서 습지가 만들어져 지형·지질학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 해안의 연안류에 의해 형성된 사취(砂嘴)가 점점 성장하여 인근의 섬과 연결될 때 그 섬을 육계도(陸繫島)라 하며, 이때 성장한 사취는 사주의 형태가 되는데 이를 육계사주라고 한다. 갈대밭과 해송 숲이 넓게 분포해 있어 철새 서식에 유리하다.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인 저어새의 주요 월동지이며, 노랑부리저어새, 황새, 원앙, 고니 등 24종의 법정보호종이 서식하는 철새도래지로 알려져 있다.

오조리에 갯벌만 있었다면, 2%의 소금이 없는 음식처럼 풍경도 조금은 심심했을 것이다. 그 2%를 채워주는 곳이 바로 바오름 혹은 바우오름(식산봉)이다. 이 곳 정상으로 가는 길목 정자에서 만나는 성산일출봉은 마치 보물상자를 열었을 때의 느낌처럼 빛이 난다.

오조리마을 물통인 용천수, 오조리마을 시골주택, 바우오름서 바라본 우도. 황근자생지(시계방향). 제주 강동삼 기자
오조리마을의 명소가 된 웰컴 투 삼달리 배경의 된 창고집. 제주 강동삼 기자
오조리 갯벌에서 바라보는 성산일출봉. 제주 강동삼 기자

# 성산일출봉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바우오름, 황근자생지, 그리고 ‘웰컴 투 삼달리’ 창고

성산일출봉에서 오조리 마을로 접어들자마자 만나는 바우오름은 금세 오른다. 높이가 45m에 지나지 않아 목계단을 잠시 오르면 전망대가 나온다. 오조리 갯벌과 성산일출봉만 오롯이 보이는 초입에서 만난 전망대와 달리 정상 2층 전망대에 오르면 성산포 마을과 우도가 한눈에 펼쳐진다.

‘바우오름’이라는 이름처럼 크고 작은 바위가 엄청 많이 박혀있는 오름이다. 바다에 직접 잇대어 있는데 고려조와 조선조내내 소섬(우도)와 오조리 바다에 유독 왜구의 침입이 잦아 당시 오조리 해안 일대를 지키던 조방장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이 오름을 낟가리처럼 위장, 마치 군량미를 쌓아 놓으니 병사도 그만큼 많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함부로 넘보지 않았다는데서 연유해 식산봉(食山峰)이라고 붙었단다.

식산봉을 내려오면 우리나라 최대 황근자생지를 만난다. 식산봉은 희귀식물인 노란 무궁화꽃을 닮은 황근이 자연적으로 자라던 곳이었다. 사라져가는 군락지를 회복하기 위해 생태계서비스지불제를 통해 습지 주변부에 수백그루의 황근나무를 심어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노란 무궁화를 닮은 꽃을 피우던 무더운 여름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려 아쉽다. 황근은 밀물과 썰물로 인해 소금기가 있는, 젖은 땅 염습지에서 자라는 저지대의 멸종위기 야생식물이다.

오조리를 마을 올레길을 시계반대방향으로 한바퀴 돌고 나오다 보면 일출봉에서 떠오는 보름달이 잔잔한 내수면에 투영되는, 동시에 두개의 달이 비춘다하는 쌍월동산을 만난다. 그 아래에는 2016년 ‘공항 가는 길’이라는 드라마로 주목받은 돌창고가 있다. 최근에는 ‘웰컴투 삼달리’의 촬영명소로 꼭 한번 들러가는 곳으로 다시 자리잡았다. ‘웰컴 투 삼달리 촬영소’라고 쓰인 나무 팻말이 시골스럽다. 그 창고 앞 호수같은 바다의 푸른 물결 위로 햇살도 하얗게 웃으며 부서지고 있었다. 성산일출봉이 손에 잡힐 듯 ‘저만치 앞서가는 님 그림자’처럼 물 위에 떠 있다.

가장 해가 먼저 뜨는 성산일출봉. 오는 27일부터 해돋이를 오전 6시부터 올라 볼 수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성산일출봉을 오르다가 만나는 개바위. 제주 강동삼 기자
성산일출봉 깎아지른 절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와 저 멀리 보이는 우도. 제주 강동삼 기자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이생진 파란시집 성산포와 성산일출봉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는 이생진 시인의 성산포를 만난다.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 사투리로 말한다/ 그러다가도 해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더 쉬운 감탄사를 쓴다’

어쩌면 성산 일출봉에 오르면 감탄사 외에는 그 어떤 말도 안 떠오른다. 그만큼 비경이다. 너무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 황홀한 나머지 말문이 막히듯.

성산일출봉은 제주도의 다른 오름들과는 달리 마그마가 물속에서 분출하면서 만들어진 수성화산체다. 화산활동시 분출된 뜨거운 마그마가 차가운 바닷물과 만나면서 화산재가 습기를 많이 머금어 끈끈한 성질을 띄게 되었고, 이것이 층을 이루면서 쌓인 것이 성산일출봉이란다.

1601년 제주로 파견된 김상헌의 남사록에 나오듯이 예부터 수많은 암봉으로 병풍같이 둘려 천연의 산성을 이루고 있다 하여 예부터 성산(城山)이라고 불렀다.

기암괴석들도 즐비한데 그 중 등경돌(징경돌) 바위에서 네번 기도하면 소원이 이뤄진단다. 주민들은 두번의 절은 제주섬을 창조한 어질고 아름다운 여신 설문대할망에 대한 것이요, 또 두번의 절은 고려말 원나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김통정 장군에 대한 것이다. 설문대할망은 치마폭에 흙을 퍼날라 낮에는 섬을 만들고 밤에든 이 바위 위에 등잔을 올려놓고 흙을 나르느라 헤어진 치마폭을 바느질했다. 이때 등잔높이가 낮아 작은 바위를 하나 더 얹어 현재의 모양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김통정 장군은 성산에 성을 쌓아 나라를 지켰는데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 동물 모양의 개바위, 매바위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전설에 따르면 성산일출봉의 봉오리가 100이었다면, 제주에도 호랑이.사자 같은 맹수가 날 것인데, 하나가 모자라 아흔 아홉이기 때문에 호랑이도 사자도 아니 난다고 한다.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본 성산읍내(상)와 성산읍내와 오조리 식산봉(중), 갯벌서 바라본 성산일출봉(하). 제주 강동삼 기자

정말 ‘어느 동쪽에도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부산피는 것 같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오는 27일부터 성산일출봉에서 새벽 해돋이를 즐길 수 있도록 관람 시간을 조정했다. 탐방시작 시간은 당초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오전 7시30분인데 이번에 오전 6시로 앞당겼다. 떠오르는 해가 자기를 가린 구름을 탓하지 않듯, 자연에 서면 투정 부리지 말아야 자연은 자기의 모습을 다 보여준다. 아침 일찍 뜨는 해를 보고 싶다면, 투정부리지 말라.

빼어난 경관과 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7월 2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곳. 2010년 10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인증되었고, 2011년엔 대한민국 자연생태관광 으뜸명소, 2012년 12월 한국관광 기네스 12선에도 선정된 곳. 어떤 수식어로도 모자란 최고의 비경을 간직한 곳, 그래서 영주 10경 중 으뜸으로 꼽히는 곳. 매년 100만명 이상이 찾는 제주의 관광명소 1번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이생진의 파란시집 ‘성산포’처럼 ‘관광으로 온 젊은 사원 하나가 만년필에 바닷물을 담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글 사진 제주 강동삼 기자

Copyright © 서울신문.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