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비논리 꼬집는 대만 라이 총통의 기발한 조국론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49회>
지난 10월 1일 중국에 가서 연예 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만 연예인 17명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5주년을 맞아 중국의 SNS 위챗에 대륙의 국경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올렸다. 그 중엔 “가장 큰 축복을 그대에게 드립니다. 나의 조국이여!”란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기사를 공유한 연예인도 세 명이나 됐고, “대만, 조국의 품에 다시 안겨야”란 문자를 올린 가수도 한 명 있었다.
대만 연예인의 노골적인 친중성 아부 발언이 대만 언론에서 큰 뉴스로 불거질 때면 라이칭더 총통은 “남의 지붕 아래서 압박을 받는 대만 예술인들이 가슴 아프다” 말하며 관용적 태도를 보여 왔다. 과거와 달리 지난 10월 5일 그는 양안(兩岸)의 이념 대결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지난 9월 1일에 취임 100일을 맞아 라이칭더(賴淸德, 1959~ ) 총통은 제정 러시아에 넘어간 청 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고 포기하는 중국공산당의 모순을 꼬집어 중·러 관계의 급소를 찌르는 외교적 지략을 발휘한 바 있다. (“슬픈 중국” 45회) 이번에도 그는 중국을 조국이라 부르는 대만 연예인의 논리적 모순을 슬쩍 들추는 기발한 유머 감각을 발휘했다.
“75세 중화인민공화국” v. “113세 중화민국”
지난 10월 5일 저녁 대만 타이베이 돔(Taipei dome) 실내경기장에서 개최된 “국경(國慶) 만회(晩會)”에 수만 명이 시민이 운집했다. 여기서 국경 만회란 중화민국의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國慶日)을 닷새 앞두고 열린 축하연을 이른다. 8년 만에 다시 열리는 이 만회에서 수만 군중 앞에 등장한 라이칭더 총통은 중화민국의 독립국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소신 발언을 이어갔다.
“우선 저는 전체 국민을 대표하여 중화민국 113세 생일을 경축합니다. (중략) 우리는 반드시 우리나라가 주권을 가진 독립 국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국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군중 박수) 동시에 선현·선열의 희생과 공헌의 정신을 학습하고, 단결하여 국가의 주권을 수호해야 합니다. 민주와 자유와 인권의 생활 방식을 수호해야만 비로소 이토록 긴 세월 희생과 공헌을 바친 분들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요? (군중 박수)”
이렇게 운을 뗀 후 라이칭더 총통은 작심한 듯 단호하게 군중을 향해 말했다.
“최근 우리의 이웃인 중화인민공화국이 막 75세의 생일을 지냈습니다. 며칠 있으면 중화민국은 113세 생일을 맞이합니다. 따라서 나이를 놓고 보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절대로 중화민국 인민의 조국(祖國)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중화민국은 도리어 중화인민공화국의 75세 이상 되시는 인민의 조국이 될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 맞나요, 틀리나요? (군중 환호) 중화민국이 대만과 그 부속 도서(펑후, 진먼, 마주)에 뿌리내린 지가 벌써 75년이나 되었으므로 우리는 다시 이러한 관계를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생일을 축하하려면 특별히 정확하게 축사를 써야 할 것입니다. 절대로 ‘조국’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맞나요, 틀리나요? (군중 환호)”
중화인민공화국 이전에 중화민국이 이미 존재했는데, 중화민국의 국민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조국이라 부른다면 시간의 선후를 뒤집는 부조리일 뿐이라는 논리다. 중국을 조국이라 부르는 재중 대만 연예인을 직접 질타하기보다는 부드럽게 그들의 개념적 모순을 꼬집고 넘어가는 그의 재치가 관중의 뜨거운 호응을 불러냈다. 그의 지적대로 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보다 무려 38년이나 먼저 제국(帝國, 황제의 나라)을 무너뜨리는 민국(民國, 국민의 나라)혁명을 통해서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1949년 10월 1일 이래 중국인들은 매해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일을 기념한다. 중국과 달리 대만에선 10월 10일을 국경일로 기념한다. 1911년 10월 10일 공화국의 이념을 내걸고 후베이성 우한에서 일어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중화민국(中華民國) 건립의 기점(起點)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더불어 중화민국은 패망했다고 주장하지만, 역사적으로 중화민국의 정부가 존속함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대륙을 빼앗긴 국민당 정권은 타이베이로 수도를 옮겨서 중화민국의 국호를 그대로 이어서 대만을 통치했다. 2차대전의 승전국이었던 바로 그 중화민국은 유엔이 1971년 10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할 때까지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으로 남아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 곧 중화민국의 종말이라는 베이징의 주장은 힘의 논리일 뿐 역사적 사실에 어긋난다.
라이칭더의 연설을 잘 들어보면, 오늘날 대만이 중화민국인 이유는 단순히 1895년 이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아온 대만을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국민당 정권이 접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 대만이 중화민국의 건국 이념을 계승하여 민주와 자유와 인권을 수호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깔려 있다. 실제로 중화민국의 건국이념은 자유로운 개개인 모두가 함께 국가의 주권자가 되는 민주공화국의 정신이었으며, 그 정신은 대만의 헌정사를 통해서 실현되었다.
바로 그 점에서 라이칭더는 “중화민국 113세 생일”을 경축함으로써 바로 오늘날 대만이 1911년 공화 혁명으로 건립된 중화민국이라는 점을 새삼 강조한다. 대만이 당당하게 중화민국의 적통을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대만의 헌정사가 민주, 자유, 인권이라는 공화 혁명의 이념을 현실에서 구현했기 때문이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은 1919년 공화 혁명의 이념에 어긋나는 공산당 일당독재로 인민의 자유와 민주를 억압하는 인권 유린의 전체주의 국가로 남아 있다.
문제는 1911년 신해혁명은 양안(兩岸)에서 모두가 중시하는 중국 현대사의 출발점이라는 점이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정복한다면 1911년 세워져서 113년간 존속해 온 중화민국은 멸망하고 공화 혁명의 정신은 단절될 수밖에 없다. 대만은 중화민국의 국호를 내걺으로써 스스로 역사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래서 대만 총통부에 쑨원((孫文, 1866-1925)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라이칭더의 국민 통합 전략
10월 5일 연설에서 라이칭더 총통이 “대만과 그 부속 도서에 중화민국이 뿌리내린 지도 이미 75년”이나 되었음을 구태여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발언 속엔 중국과의 관계를 놓고 국민당과 민진당으로 분열된 대만 국민을 하나로 모으려는 통합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국민당 지지자 중에는 라이칭더 총통을 극단적 ‘대독(臺獨, 대만 독립) 운동가라 여겨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그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중국에 맞서 대만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발언을 숱하게 이어갔고, 그를 비판하는 국민당 지지자들은 “전쟁이냐, 평화냐?”의 구호로 맞섰다.
라이칭더 총통은 지난 5월 20일 총통 취임사에서도 대만의 독자적 역사성을 강조하는 강성 발언을 남겼다. 당시 그는 중화민국의 헌법을 근거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서로 예속 관계가 아니다”라는 강력한 독립의 원칙을 천명한 후 취임사 맺음말에서 “도발적” 주장을 이어갔다. 그는 바로 그날 밤 타이난(臺南)시에서 국빈 연회가 열린다면서 “1624년 이래 대만이 세계화에 연결된 지 400년”이라고 말했다. 1624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타이난(臺南)을 점령하여 요새를 짓고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던 사건이 대만 세계화의 출발점이라는 적극적 평가이다. 라이칭더의 이 발언은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지만, 중국 정부는 물론 대만의 국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러한 라이칭더의 역사관은 대만 안팎에서 충분히 반중-대독 노선의 공식적 선언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민주, 자유, 인권 뿐만 아니라 수출주도의 개방적 시장경제를 구현하는 오늘날의 대만은 중화 문명의 영향이 아니라 서구 문명과의 접촉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다는 탈식민주의적인(post-colonial) “대만인(臺灣人) 의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기 때문이다. 민진당 지지자 중에는 그의 역사의식에 흔쾌히 동의하는 사람들이 다수지만, 지난 총통 선거에서 합쳐서 60% 가까이 득표한 국민당이나 민중당 지지자 중에서 그러한 라이칭더의 견해에 비판적이거나 유보적인 국민이 많다.
라이칭더의 역사의식은 1962년 대만 독립의 교부(敎父)라 칭송되는 역사학자이자 작가 쑤벙(Su Beng, 史明, 1918-2019)을 떠올리게 한다. 1952년 국민당의 핍박을 피해서 일본으로 망명한 쑤벙이 일본어로 저술하여 일본에서 1962년에 출판된 ‘대만인(臺灣人) 4백년사(四百年史)’는 대만 민족주의와 독립·건국의 의지를 밝힌 대독(臺獨) 좌파의 기념비적 저서이다. 피식민지 민중의 시각에서 대만인의 지난 4백 년 역사를 정리한 이 책은 계엄 시기 국민당 정권 통치 아래서 금서(禁書)로 분류됐으나 1960년대 말부터 중문판이 대만인 사이에서 널리 읽혔고, 1986년 영문판이 출판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진 대만 역사의 명저로 꼽힌다.
1540쪽에 달하는 이 책은 고대의 말레이-인도네시아계 원주민의 정착에서 명대(明代, 1368-1644) 한족의 이주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는 4장에 걸쳐 46쪽으로 정리한 후, 나머지는 제5장 “세계사에 출현한 대만”부터는 지난 400여 년의 세월 동안 대만 민중이 거쳐 갔던 피식민의 역사에 할애한다. 네덜란드, 정씨(鄭氏) 왕조, 청조(淸朝), 일제를 거쳐 마지막 제11장과 제12장에서 국민당 정권 이후의 역사를 다루는데, 그는 국민당 정권을 “중국 장가(蔣家) 군벌 정권”이라 낮춰 부른다.
라이칭더의 역사의식은 쑤벙의 역사관과 공명한다. 물론 대만 국민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분열상을 잘 알고 있는 라이칭더는 취임사에서 통합과 화합의 메시지를 빠트리진 않았다. 그는 대만은 서로 다른 시기에 이 섬으로 이주해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 종족 모두의 땅이라면서 “어떤 이는 중화민국(the Republic of China, ROC), 어떤 이는 중화민국 대만(ROC Taiwan), 또 어떤 이는 대만(Taiwan)이라 부르지만, 무엇이라 부르든 우리는 빛날 것”이라 했다.
그 정도에서 대충 대만의 국명을 둘러싼 논쟁을 정리했던 라이칭더는 지난 10월 5일에는 분명하게 “중화민국”을 대만의 공식 국명으로 사용했다. 밖으로 중국을 향해선 대만 독립의 메시지를 다시금 분명하게 던지면서, 안으로 사분오열된 대만 국민을 향해선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의 국명을 확실하게 되살려 민진당과 국민당의 화해를 꾀하는 한 수였다.
중국공산당의 늑장 대응, 논리적 빈약함을 드러내
10월 7일 홍콩의 중문 언론 명보(明報)에는 라이칭더 이 연설에 관한 대만 출신 정치학자 린취안중(林泉忠, 현 도쿄 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연구원)의 분석 기사가 실렸다. 린취안중은 이 연설의 특징을 세 가지로 꼽았다. 첫째, 대만의 주류 민심을 규합하여 반대할 수 없도록 할 뿐더러, 심지어는 지지층을 넓힐 수도 있다는 점, 둘째, 국민당의 입장까지 포용하여 최소한 국민당이 정면으로 반대할 수 없게 한다는 점, 셋째, 베이징이 논리적으로 대응하기 곤란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대내적으로 지지층을 넓히고, 국민당의 반대를 억지하고, 나아가 베이징을 논리적 함정에 빠뜨리는 “일타삼피”의 묘수라는 해석이다.
린취안중이 예견했듯 중국 국무원의 대만 사무 판공실(국대판)에서는 사흘이 지나서야 라이칭더의 연설에 대한 공식 대응을 내놓았다. 중국 측은 기껏 “1945년 10월 25일 중국 정부가 대만을 회복하여 주권을 행사했다”는 점,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 인민 정부가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중국 유일의 합법정부라고 선언했다”는 점을 들어 대만의 “신양국론(新兩國論)”과 대독(臺獨) 움직임을 비난했다. 쉽게 말해 일본 패망 후 대만은 중화민국에 넘어갔는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바로 그 중화민국을 접수했다는 비역사적 주장일 뿐이다. 대만 언론들은 ‘챗GPT’에 물어보니 1초도 안 돼서 뚝딱 답안지를 내놓던데 중국공산당은 왜 사흘이나 걸리고도 그 정도밖에 못했냐며 조롱했다.
역사적으로 엄격하게 말하면, 양안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국공내전의 연장이라 볼 수밖에 없다. 국공내전의 결과 1949년까지 중국은 대륙의 전 영토를 점령했지만, 지금까지도 중국은 대만을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전혀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라는 주장은 양안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일방적인 “중국몽”일 뿐이다. 지난 9월 1일에 이어 10월 5일의 논전 역시도 라이칭더 총통의 한판승이었다.
라이칭더 총통은 탄탄한 역사 지식과 정연한 정치철학으로 중국공산당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여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는 외교적 지략을 과시하고 있다. 그 방법이 기발하고도 유쾌하여 세계 모든 나라가 중국 다루기의 정석으로 삼을 만하다. 특히 중국 앞에 서면 작아지기만 하는 대한민국 외교부의 실무진들이 되새겨야 할 대중 외교의 기본기가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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