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연금술사 전국광, 한대수 콘서트서 즉흥시 퍼포먼스

2024. 10. 12.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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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친구들
전국광은 1945년 12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목가구 공장을 경영했다. 6·25 전쟁 통에 목가구 공장은 파괴되었고 부친도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졸지에 피난민이 된 전국광은 1·4후퇴 때 공주로 내려가 유구국민학교에 입학했다. 1년 후 부산으로 가서 3년간 피난학교를 다녔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서 퇴계로의 일신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배문중학교를 거쳐 배문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소년 전국광은 매우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모뉴멘트 조각의 제작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고등학생 전국광은 평양미술대학 출신의 박재소 밑에서 일했다. 박재소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조각가는 아니었으나 수유리 한신대학교 앞에서 기념조형물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밑에서 조수 일을 했다. 전국광은 중학생 때부터 이미 석고돌이 일을 했다. 석고돌이란 석고를 개는 일꾼을 말한다. 석고에 물이 들어가자마자 굳기 시작한다. 굳기 전에 빨리 개어 석고가 조각가의 손에 전달되어야 한다. 전국광은 손이 빨랐다.

오페라 원어 노래, 송창식에게 배워 불러
전국광 작가의 생전 모습.
1963년 개막식을 올린 수유리 4·19 기념탑의 군상 제작자로 김경승이 지명되었다. 대형조형물인 만큼 여러 후배 조각가들이 힘을 더해야 했다. 김경승의 제자인 박석원·정관모 등이 제작에 참여했다. 박석원의 작업실은 지금의 공덕역 근처 서울대 동문회관 자리쯤이었다. 전국광은 공덕동으로 와서 박석원 밑에서 4·19 기념탑 제작에 보조로 참여했다. 전국광은 고등학교를 쉬고 있었다. 박석원은 자신이 미술교사로 있는 인천의 선인고교에 전국광을 미술 특기생으로 편입시켰다. 선인고교를 2년 다녔다. 조각가 이일호(1946~)가 홍대에 입학했을 때 아직 고등학생인 전국광은 홍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박석원·이종각·조성묵 등의 쟁쟁한 조각가 밑에서 일을 한 전국광은 고교생임에도 홍대 조각과 교수들과 다 친한 상태였던 것.

고교 시절 홍익대에서 실시하는 미술대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최고상 수상자는 무시험 입학이었다. 당연히 수험공부를 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전국광이 입학하려 한 해에 그 제도가 없어졌다. 입시에 낙방했다. 남들보다 고교 졸업이 2년이나 늦었던 전국광은 재수까지 하여 동기들보다 세 살이나 많은 나이로 홍대에 입학했다. 말이 대학 신입생이지 고교생 신분으로 현장에서 조각의 모든 것을 이미 다 마스터한 전국광은 솜씨가 기성작가나 마찬가지였다.

1972년, 에스프리 그룹이 결성되었다. 전국광·이일호·이병용·김태호·김용익·황효창·노재승·장식·양승욱·김명수·김광진 등이 멤버였다. 신촌로터리에서 연세대를 향하다가 신촌 기차역으로 꺽어지는 길을 따라 50미터쯤 가다 보면 오른쪽 언덕배기에 40대의 맘씨 좋은 함경도 아줌마가 주인인 술집 ‘엄마네 집’이 있었다.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외상술도 잘 주고 다른 손님이 남긴 빈대떡을 안주로 챙겨주기도 했다. 그곳이 에스프리 그룹이 한 달에 한번 모이는 회동 장소였다. 김용익이 미국의 미술잡지 ‘아트 인 아메리카’이 중요 부분을 발췌한 후 우리말로 번역하여 발표했다. 일본의 미술잡지 ‘미술수첩’을 번역하여 발표하는 이도 있었다. 전국광은 철학, 문학을 주제로 토론을 이끌어갔다.

전국광은 문학도였다. ‘섬’을 쓴 장 그르니에, ‘길 위에서’의 소설가 잭 케루악을 좋아했다. 전국광은 문학 서클 ‘다리’의 동인이었다. 수십 편의 시를 남겼다. 매일 일기를 쓰고 수시로 작업 아이디어를 글로 남겼다. 나중에는 희곡에까지 도전했다. 전국광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친구 송창식에게서 배운 노래가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었다. ‘우나 뿌르띠바 라그리마’로 시작되는 이탈리아 원어 가사로 불렀다. 세련된 성악가의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전국광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은 구슬프고 절절한 데가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폴 앵커의 ‘크레이지 러브’를 부르다가 급기야 긴 머리카락을 흔드는 헤드뱅잉 춤동작으로 고래고래 악을 쓰며 격렬한 노래에 이르기도 하였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전국광은 체격이 크지 않다. 체격에 비해 손발은 엄청 컸다. 젖몸살을 하는 어머니의 젖을 먹는 바람에 전국광의 입술 주변이 곪아버렸다. 그걸 감추느라 콧수염을 길렀다. 외모부터 뭔가 기괴한 사람이었다.

1982년 뉴욕에 모인 예술가들. 왼쪽부터 이태호, 이병용, 전국광, 양화선, 정찬승, 한대수. [사진 황인]
미국에서 온 가수 한대수(1948~)는 성대 입구에서 살았다. 파격적인 개성의 전국광과 한대수는 만나자마자 친해졌다. 1968년 남산의 드라마센터에서 한대수의 공연이 있었다. ‘행복의 나라’ ‘잘 가세’ 등 한대수의 자작곡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전국광이 무대에 뛰어 올라가 시를 낭송했다. “내 속에 간이 있다. 던져 버려! // 내 속에 간이 있다 던져 버려!” 검정 터틀 스웨트 셔츠와 검정 바지에 검정 안경을 쓴 전국광의 난데없는 퍼포먼스에 관중들은 환호했다.

전국광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 상대는 같은 조각과의 양화선(1947~). 양화선은 전주여중 3학년 때 미술교사로 부임한 조각가 김윤신을 만났다. 김윤신은 2년간 근무하다가 파리로 갔다. 소녀 양화선에게 김윤신 선생님은 너무나 멋있었다. 양화선은 조각가가 되기를 결심하고 전주여고 졸업 후 홍대에 입학했다. 양화선이 대학 3학년 때 대학 2학년인 전국광을 만났다. 학년은 양화선이 한 학년 위고 나이는 전국광이 두 살 더 많았다. 전국광은 말투가 부드러운 동급생 화가 신성희(1948~2009)를 대동하고 양화선에게 접근했다. 세 사람은 학교 앞의 술집으로 갔다. 양화선은 작은 키에 미남과는 거리가 먼 외모, 거기다 복장 불량인 전국광이 싫었다. 술이 한잔 들어가자 전국광은 자신의 애창곡 ‘크레이지 러브’를 불렀다. 거칠긴 했어도 구애의 노래였다. 양화선의 마음은 점점 전국광에게로 끌려갔다.

돌을 말랑한 흙·종이처럼 쌓아올려
전국광의 조각 작품 ‘적’(1979) 화강석, 20x70x45㎝. [사진 황인]
1974년 1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서강대 앞 허름한 2층 건물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 한 달 후 전국광은 대학을 졸업했다. 그해 수유리 장미원 근처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1980년 전국광은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1년 국전 비구상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해 일본 교토의 마로니에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이를 전후하여 재일교포 미술작가 곽덕준(1937~)과 친해지게 되었다. 곽덕준은 교토 출신으로 힘든 생활을 이겨내고 일본 미술계에 이름을 알린 작가다. 성장환경, 성격 등 여러 면에서 전국광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전국광은 전시회 또는 조각 심포지엄의 일로 일본을 자주 방문했다. 조심성이 많은 일본인들은 자신들과 정반대의 성격인 좌충우돌과 호연지기의 전국광을 좋아했다.

전국광은 체제에 순응하며 눈치나 보는 선배, 후배들을 싫어했다. 대들기도 했다. 그 대신 삐딱하게 보이나 곧은 성격의 후배들에게는 자상했다. 홍대에는 전국광·김진성·류인 등 울퉁불퉁하게 귀여운 조각가의 계보가 있었다.

1982년 영남대학교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다. 국광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사과의 고장 대구 생활이 시작되었다. 전국광은 대구에서 양화선은 서울에서, 부부는 떨어져 살았다. 교수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에 사직서를 낸 게 1985년이었다. 1988년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녹촌리의 700평 목장 공간을 구입하여 작업장으로 꾸몄다. 아르헨티나에서 살던 양화선의 은사 조각가 김윤신이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때, 이 작업실을 찾아왔다. 전국광 가족과 함께 어린애처럼 썰매를 타며 놀았다.

전국광은 돌 작업을 많이 했다. 돌은 단단한 것이지만 전국광은 돌을 물컹한 흙처럼 흘러내리게 하거나 말랑한 종이처럼 쌓아올렸다. 전국광의 심안에 걸리면 돌은 돌이 아닌 다른 물성으로 변신했다.

지적이면서도 충동적이었던 조각가 전국광. 1990년, 물놀이에 간 그는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45세, 아까운 나이였다. 끝까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 전국광이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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