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건축가 김원의 세상 이야기 ⑫ '단디 해라'의 어원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 등 설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이에 연합뉴스 K컬처 팀은 독자 제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며칠 전 한글날을 맞아 다시 한번 우리말에 대해 생각해봤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우리말은 오랜 기간 동안 여러 갈래의 계통에서 유래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었지만, 잘 들여다보면 복잡다단한 계보가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구미(歐美)에서 흘러 들어온 외래어가 판을 치고 있는데 그전에는 일제강점기에 쓰이던 일본말이 우리말로 자리 잡은 경우도 많았다.
그보다 더 이전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테니 우리말 중 일부는 당연히 중국 한족의 말에서도 많이 넘어왔다고 본다.
청나라의 영향으로는 만주족의 말이, 원나라의 영향으로는 몽골족의 말이 들어와 쓰였을 것이다.
지역적으로, 민족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 말고도 종교적 영향을 받아 사용된 말 중에는 불교 용어가 많을 것이다. 아마도 조선, 고려 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신라 때부터라고 봐야 한다.
벌써 1천5백여년 전 신라나 불교의 영향이라고 보기에는 지금도 너무 생생하게 쓰이는 일상의 용어를 발견하면 때로는 놀랍기도 하다.
출가(出家)니, 삭발(削髮)이니, 수계(受戒), 도량(道場), 성불(成佛)이니 해탈(解脫), 열반(涅槃) 같은 말은 아예 종교 용어라 치더라도, 귀천(歸天), 소천(召天)이란 말은 불교 용어를 넘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갔다'는 뜻의 일상 언어로 편안하게 정착한 지 오래다.
법흥왕(法興王), 법주사(法住寺)라고 쓸 때의 '법'(法)은 바로 불법(佛法), 즉 부처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 유래하여 '법' 자로 시작하는 단어가 꽤 많다. 법어(法語)는 부처님의 설교이며, 연초에 높은 스님이 발표하는 법언(法諺)은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좋은 말을 뜻한다.
법의(法衣)는 승복이고, 법당(法堂)은 절이나 그 건물을 말하는 것이며, 법명(法名)은 돌아가신 스님에게 붙이는 이름이다. 법식(法式)은 불교 의식 전반을 말하고 법회(法會)는 의식을 위한 모임이 된다.
법계(法界)라 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 전체이고, 법등(法燈)이란 불법(佛法) 즉, 불교 교리 전체를 일컫는다.
어려운 말이지만 법열(法悅)은 종교적 엑스터시이며, 법랍(法臘)은 스님이 계를 받은 때부터 따진 나이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법석'이란 말은 아주 쉬운 말 같지만, 실은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는 어려운 불교 용어에서 왔다.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이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다.
그러니 법당이 좁고 모자라서 바깥에 법회 자리를 만든 것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 무려 3백만 명이 모였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 질서가 없고 소란스럽고 어수선했다. 이처럼 경황이 없고 시끄러운 상태를 가리키던 '야단법석'이란 말이 속세에 일반화돼 "왜 야단이냐? 웬 법석이냐?"처럼 흔히 쓰이게 됐다고 한다.
그런 어려운 말에서 온 아주 쉬운 말이 또 있다.
"제법 잘한다"라고 할 때 제법(諸法)은 불교에서 모든 법도를 말하는 어려운 용어였고, "제발 부탁"이라고 할 때 제발(諸發)은 모든 발원(發願)을 말하는 고상한 용어였다.
우리는 '대단하다'는 표현을 흔히 쓰지만, 불교에서 '대단'(大斷)이란 '목숨까지 걸 각오로 아득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큰 결단'을 뜻한다. 남양주의 금선사 주지 홍산 스님의 해석에 따르면, 흔히 "단단히 해라"라고 할 때 '단단'(斷斷)은 그런 결단을 두 번 강조하는 더욱 어려운 말이라고 한다.
"단단히 해라"는 표준말이고, 내가 어렸을 적 살았던 부산에서는 "단디 해라"라고 했다. 벽에 못을 박을 때, 물건을 포장지로 쌀 때, 운동화 끈을 묶을 때 맨날 듣는 말이 "단디 해라"였다.
그것은 어른들이 아랫것들에게 가장 흔히 쓰신 말 중 한마디였다. 모든 욕심을 끊고(斷) 일로(一路) 정진 수행(精進 修行)한다는 뜻으로, 오로지 한 가지만 열심히 잘하라는 어렵고 심오한 말이 이렇게 흔한 말이 된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렇게 고매하고 난삽한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쉽게 풀어서 일상에 갖다 써먹었다.
한국 사람들 참 제법이고, 한국말 참 대단하다. 제발 한국말 좀 아끼고 사랑하자.
참고로 내가 가진 '(불교에서 유래한)상용어 지명사전'(박호석 편저, 불광출판사, 2011)에 의하면 '대단하다'를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라고 하면서
'법당'(法堂)에서 주존불(主尊佛)을 모시는 단(壇)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통은 상단(上壇)이라고 한다. 법당에는 일반적으로 부처님이나 보살을 모시는 상단과, 신중(神衆)을 모시는 중단(中壇), 그리고 영가(靈駕)를 모시는 하단(下壇)이 있다.
여기서 상단을 대단(大壇)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이나 보살을 모신 대단이 중단과 하단보다 훨씬 중요하고 장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은 '대단하다'라고 하면 '훨씬 좋다, 훌륭하다, 뛰어나다, 크고 많다' 따위의 의미로 쓰이게 됐다고 해설하고 있다.
물론 나는 홍산 스님의 해석을 더 믿는 편이지만.
* 자세한 내용은 김원 건축가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성도현 기자>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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