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집이라는 자유, 집이라는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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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연다.
막상 '내 집'이 생겼을 때,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펼쳐졌다.
'근린생활자'는 전셋집을 구하러 다니던 '상욱'이 부동산 중개인의 제안에 넘어가 생각지 않게 집을 사게 되면서 겪는 해프닝을 그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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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린생활자
배지영 지음 l 한겨레출판(2019)
창문을 연다. 장대비가 내리꽂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맞은편 아파트 동으로 가파르게 놓인 사다리가 보인다. 이삿짐을 나르는 차에 연결된 사다리다. 비닐을 둘러쓴 세간과 박스가 비를 뚫고 위태롭게 상승해가는 광경을 보고 있으니 철렁 마음이 내려앉는다. 나도 이런 날 이사하게 될 수 있겠구나! 전세 계약을 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시점, 계약 기간이 22개월이나 남았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안했다. 사다리차 위로 아슬아슬하게 올라가는 이삿짐의 두 번째 상승을 보며 나는 수십번 해온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지금 사는 집이 내 집이었다면. 아아, 그랬다면 저런 광경에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았을 텐데!
막상 ‘내 집’이 생겼을 때,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펼쳐졌다. 집주인이 나가라면 언제든 이사가야 한다는 불안이 소거된 데서 오는 안도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집을 사면서 지게 된 빚에 대한 부담, 그리고 다른 지역 집값은 오르는데 내가 사는 지역의 집값은 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박탈감이 생활을 휘감아 돌았다. 아, ‘내 집’이 있다고 마냥 좋은 게 아니구나!
‘근린생활자’는 전셋집을 구하러 다니던 ‘상욱’이 부동산 중개인의 제안에 넘어가 생각지 않게 집을 사게 되면서 겪는 해프닝을 그린 이야기다. 대상 매물은 ‘근린생활 시설’이다. 사람이 먹고 자며 생활하는 주거용이 아닌 ‘상가’로 나온 공간이기에, 원래 보일러와 싱크대를 설치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집에는 보일러와 싱크대가 있다. 준공 허가를 받은 뒤 편법으로 설치한 것이다. 부동산 중개인은 그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 사실을 누군가 신고하지만 않는다면. 결국 상욱은 빚을 내어 ‘근생’인 매물을 사들이고, 이후 자가 소유자로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 자부심에는 다달이 이자를 내야 하는 데서 오는 부담감, 친구에게 제가 소유한 집임을 속이고 월세를 받는 데서 오는 죄책감, 누군가 신고할까 봐 불안해하는 마음이 진드기처럼 들러붙는다. 시간이 갈수록 자부심보다 불안감이 비중이 높아지고,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불안감은 어느 날 구청에서 나온 점퍼 차림의 사내가 방문하면서 확연하고 구체적인 현실로 뒤바뀐다.
흥미로운 것은 모든 것이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 버린 직후 상욱이 느끼는 감정이다. 순식간에 자가 소유주의 지위가 날아가고 막대한 금전적 손해를 입게 되었지만, 상욱은 ‘가슴 속에 얹힌 무언가가 내려가는 것 같’다고 느낀다. 전원을 껐다 다시 켠 듯, 커다란 안도감이 내면을 채운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귓전에 엘리베이터를 수리하는 동안 만났던 여성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려 퍼진다. 갑자기 되살아난 낯선 여성의 목소리는 상욱에게 자가 소유자의 지위를 누렸던 짧은 찰나에 대한 메타포가 되어 강렬하게 박힌다.
우연과 필연, 간절한 바람과 그 바람을 이룬 뒤 현실에서 맛보는 환멸감이 뒤엉키며 빠르게 소용돌이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독자에게 ‘인생’을 손으로 만져본 듯한 생생함을 선사한다. 오랜 세월 갈망해온 것을 내줌과 동시에 그 갈망에 따른 만족감을 가차 없이 소멸시켜버리는 신의 매정한 손길을 직접 감각해 본 듯한 느낌을.
정아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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