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정, 18년만에 새 시집 “시를 쓰는 동안은 시간이 멎어”

장재선 기자 2024. 10. 1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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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이 울지도 못했고 뜨거운 사랑도, 이별도 하지 못했다.

18년 만에 시집을 펴내는 건 게으름 탓이 아니라 그만큼 숙성할 시공간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희로애락에 시달리는 것은 그 갈등 탓이다.

그 끝에서 늙어감과 죽음의 절망을 긍정하는 노래를 짓는 것이 시인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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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정 시인.

‘등단하자마자 2년에 걸쳐 연달아 두 권의 시집을 내고 18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묶는다.

그동안 많이 울지도 못했고 뜨거운 사랑도, 이별도 하지 못했다.

우는 것도 사람도 게으름에는 속수무책.

아주 실컷 울었다.

연인과도 헤어졌다.

이별 앞에서 행복해졌다.

시를 쓰는 동안은 시간이 멎었다.’

이애정 시인이 시집 ‘르노와르의 꽃’(책만드는 집)에 붙인 시인의 말이다. 시를 쓰는 동안은 시간이 멎었다니 그 경지가 도저하다. 18년 만에 시집을 펴내는 건 게으름 탓이 아니라 그만큼 숙성할 시공간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이번 시집은 77편의 시를 4부로 나눠 실었다. 1부 ‘길 위에서’는 세상살이에서의 성찰을 담고 있다. 표제작 전문은 다음과 같다.

길 위에 서고 보니 네가 보인다

질경이처럼

철저히 밟혀야만

갈 수 있는 길로

너는 여행을 떠났구나

때로

길 위에서 길을 잃을 때도 있겠지만

길과 더불어 세월은 간다

뒤뚱뒤뚱 길 위를 걷다 보니

예전엔 네가 아기였지만

이제는 엄마가

너의 아기가 되어가는 것을 알겠다

너는 돌아오기 위해 떠났고

나는 떠나기 위해

길을 가겠지

여기까지 오다 보니

길은 기다림이었구나

너를 기다리며

어제처럼 편지를 쓴다

인간은 속세의 욕망과 탈속의 자유 사이에서 늘 갈등한다. 희로애락에 시달리는 것은 그 갈등 탓이다. 죽음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원히 살 것처럼 군다. 시인이란 족속은 여느 사람들처럼 그 어리석음 대열에 서 있으면서도 생과 사의 무게를 재보는 일을 한다.

평생 먹을 먹이가 상여가 되는 걸 본다

개미도 죽고 황소도 죽는다

무덤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지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개미 상여’ 일부

2부 ‘르누와르의 꽃’은 명작 그림에 걸맞은 수작의 작품들을 품고 있다. 인간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를 미학의 성취가 높은 운문으로 직조해놨다. "시를 쓴 시인 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도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됐다"라고 하는 이의 개성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그 살아있음의 쾌감이 독자에게도 스며든다. 다음은 표제작 전문이다.

봄날

나는 르누아르의 여인이 되었다

풀밭에서도 벗고

나무 아래서도 벗고

잠을 자면서도 벗을 것이다

마음이 몸을 따라 하는 것도

그와 함께 할 것이다.

봄날

아!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벼운 것이냐

바람나고 싶다

살아 있는 것 모두 부활을 꿈꾸지 않는 것은 없다

평등하고 싶지 않은 것 또한 없다

가는 봄 속에 오는 봄도 있다

3부 ‘아버지의 산’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부모의 삶을 생각하며 수신(修身)하는 내용이 주종이다. 이 시인의 아버지가 한국 현대시 거장인 이동주(1920~1979) 시인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최미나(1932~2014) 소설가이다.

이동주 시인은 언론과 학계에 재직했으나 아내와 자식들에게 적빈의 살림을 꾸리게 했다. 그러나 온화한 성품과 넓은 학식은 자부심이라는 자산을 남겨줬다.

아버지 생전 오르시던 산

당신 사후 내가 걷는다

높은 나무는 우러러보고

낮은 풀은 몸을 숙여보라던

산에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린다

- 시 ‘아버지의 산’ 일부

4부 ‘시간을 견디는 법’을 읽다 보면 가슴이 아릿해진다. 사랑하는 마음이 고독과 상실감에 짓눌리는 걸 봐야 하는 탓이다.

삶의 윤기가 노화와 병고에 희미해지는 것을 견뎌야 하는 이 시간을 어찌할꼬, 라는 탄식이 나온다. 그 끝에서 늙어감과 죽음의 절망을 긍정하는 노래를 짓는 것이 시인이 할 일이다.

절망이 지나치면

노래가 된다

노래는 온몸으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을 날다 보면

땅이, 땅이 그립다

땅을 밟다 보면

시간이 세워지고

고통을 축제로 만들어

너와 나의 관계의 시작

아! 살아남았구나

- ‘로뎅의 <칼레의 시민>을 보고’ 전문

이번 시집 해설을 쓴 김경식 시인(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은 "자화상 같은 이번 시집이 보편성을 지니게 하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본성과 심리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묘파했다. "이 시인은 솔직하면서도 매우 주관적인 성찰을 통해 이를 희생과 사랑의 미학으로 훌륭하게 승화시켰다."

장재선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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