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한국어가 아니라고? [말록 홈즈]
모레면 한글날입니다. 언제나처럼 신문과 방송에서는 고매한 분들께서 습관처럼 청소년의 신조어와 외계어 사용을 꾸짖고, 외래어 남용에 깊은 염려를 나타내실 겁니다. 그 소중한 훈계로 우리 언어를 지켰다는 성취감에 뿌듯해 하실 거라고 예상합니다. 뭐 언제는 안 그랬나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들어왔던 좋은 말씀인걸요.
언제부턴가 그 말씀이 너무 지겹고 공감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오늘 말록 홈즈는 한국어와 한글과 한글날에 대해 조금 색다르게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위대한 훈화말씀 좀 대들어볼 생각합니다.
1. 한글은 한국어가 아니다
한글은 한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입니다. 로마자(알파벳)가 영어가 아니고, 한자가 중국어가 아니며, 카나가 일본어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10월 9일 한글날에는 우리글에 집중하고, 하루를 더 공휴일이 아닌 기념일 ‘한국어의 날’로 만들어 우리말의 지혜로운 활용과 발전방향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 좋겠습니다. 하루에 담기엔 그 내용이 아주 방대하고, 말과 글을 함께 이여기하다 보니 혼동도 야기되기 때문입니다. 한글과 한국어를 누가 헷갈리냐구요? 한글날 신조어, 외계어, 외국어, 외래어 사용 지적이 항상 이어지는데, 이게 글의 날인지 말의 날인지 혼동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2. 한글이란 이름은 20세기에 지어졌다
세종대왕이 만든 문자의 이름은 ‘훈민정음(訓民正音: 가르칠 훈, 백성 민, 바를 정, 소리 음.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으로, 1443년 창제되어 1446년 반포되었습니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1910년대에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이나 친일반민족행위자 최남선이 지었다는 설이 전해지며, ‘한(韓)민족의 글’ 혹은 ‘아름다운/큰 글’로 해석하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3. 한국어는 탁월한 언어인가?
보통 한글날 나오는 메시지들은, 국가적 사명감을 강조한 엄숙주의 색채가 짙습니다. 조상들이 피와 땀으로 지켜온 소중한 우리말을 후세들이 잘 이어받고 발전시켜, 국가와 민족의 문화적 우수성을 온 세계에 떨치자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룹니다. 이를 위해 바르고 고운 순우리말을 써야 한다고 부르짖습니다.
인류의 가장 완벽에 가까운 문자인 한글과 달리, 한국어는 성장에 한계가 있습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언중(言衆: 말씀 언, 무리 중. 언어를 쓰는 대중)이 적어, 세계로 뻗어가는 확장성이 떨어집니다.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의 경우 사용지역이 넓고 언어 사용자도 많아, 새로운 컨텐츠로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데 유리합니다. 저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미생’을 ‘죽은 시인의 사회’, ‘머니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보다 재미있게 읽고 보았습니다. 정서와 문화 공감대를 넘어, 내용을 쉽게 이해하고 읽을 수 있다면 세계인의 큰 사랑을 받을 거라 확신합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말의 강점으로 어휘의 다양성을 강조합니다. 파란색을 예로 들며 새파랗다, 시퍼렇다, 푸르스름하다 등 접사와 어미 등을 활용한 다양한 어휘를 제시하는데, 영어에도 라이트 블루, 네이비 블루, 코발트 블루, 앨리스 블루 등 다양한 표현들이 있어, 우리만의 특장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4. 한국어의 아쉬운 점
다언어로 강연을 자주 하는 분들은, 종종 한국어의 단점으로 에너지 소모를 거론합니다. 기역(ㄱ)이나 비읍(ㅂ)으로 끝나는 한자어 종성이 많고 말에도 리듬이 적어, 영어나 중국어로 말할 때보다 힘이 더 들고 허기가 일찍 찾아온다고 토로합니다. 보편적 상황이 아니니 그냥 애교로 흘립니다.
제가 생각하는 우리말의 가장 큰 문제점은, 뜻 모르고 말하는 단어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습니다. 한국어 어휘의 70% 이상이 한자어라고 합니다. 점점 영어와 프랑스어 같은 유럽어의 비중이 커지고 있긴 하지만, 이는 한자어가 줄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새로운 낱말들은 여전히 대부분 한자어로 만들어집니다. 모든 지역, 모든 역사 속에서 단어는 짧고 발음하기 편하게 변화합니다. 한자는 짧은 음절에 다양한 의미를 구체적으로 포용하기에 적합한 문자입니다. 오늘 글에 제가 쓴 한자어들을 모두 순우리말로 풀어 본다면, 문자의 분량이 크게 늘어나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도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공교육에서 사실상 한자교육이 소멸되며 언중의 집단지성과 문해력이라 불리는, 글을 이해하는 능력이 하락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뜻 모르고 쓰는 말이 많아지면서 소통에 오해와 갈등이 발생하며, 사회 변화의 신속성과 유연성도 낮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말록 홈즈를 연재하는 목적은, 사람들이 좀더 말을 쉽게 이해하고 편하게 사용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이를 통해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바탕을 함께 일구고 싶습니다.
5. 대중과 함께 한국어가 발전하려면
한국어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곳은 바로 국립국어원입니다. 우리말 어법이나 맞춤법에 대한 사이버강좌를 무료로 운영하고, 언중들의 궁금증도 해결해 줍니다. 저도 10여 년 전 띄어쓰기와 우리말 어법 등 세 과목을 공부해 아직까지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종 갈증과 허기를 느낍니다. 국어원의 설명과 답변들은 종종 지나치게 방어적입니다. 어떤 말의 뜻을 물어보면 문헌이나 기록에 나와있지 않은 말에 대해서는 답변해 줄 수 없다는 답변을 자주 받습니다. 말은 국가의 문화와 국민의 정서를 담는 중요한 자산입니다. 예산이 모자라면 증액하고, 인력이 부족하면 충원해서 운영할 가치가 충분한 영역입니다.
국립한글박물관에서도 좋은 자료들을 자주 올려주십니다. 아래 단어들은 얼마 전 소개된 ‘외래어, 한자어가 아닌 순 우리말들’입니다.
단어들은 ‘뜻의 뿌리’인 어근과 ‘뜻을 가진 최소 단위의 구성 요소’인 형태소가 있습니다. 순우리말을 이야기할 때, 말의 기본 뜻을 이루는 요소들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면, 이해와 공감이 더 커질 거라 기대합니다. 그래서 미력하나마 개인적 유추와 상상을 더해 뜻을 짐작해 보았습니다.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시도에 의미를 둡니다.
1. 멜빵: 멜(메다) + 빵(띠)
*경상북도 충청도 사투리로는 허리띠를 허리빵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투리: 샅(틈/구석) + 두리(두르다/말하다/풀다). 참고: 넋두리
2. 모꼬지: 모(모임) + 갖이(갖춤)
3. 짜장: 잦(자주) + 앙(감탄형 어미)
*무리한 추측일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런 상황이 잦아(과연 그렇지).” 정도로 짜맞춰 봤습니다. 짜장은 본래 강원도 사투리가 표준어가 된 말입니다. 사실상 쓰지 않는 낱말로, 종종 이렇게 재밋거리로 거론됩니다.
4. 범: “어흥!” 소리가 옛날 사람들에겐 “범~!”으로 들린 것 아닐까요? 늑대의 다른 말 ‘이리’도 “이르릉(으르렁)”에서 왔다고 추정합니다. 이르릉(위협음) + 이(행위자)
5. 근심: 근(무게) + 심(마음)
한 근, 두 근 중량을 세듯, 근심은 ‘천근만근 무거운 마음’이란 의미로 해석하면 그럴 듯해 보입니다.
그동안 찾아봤던 낱말들 중에는 순우리말로 잘못 알려진 한자어들도 있습니다. ‘대장간’은 중국어 ‘티에장푸: 철장포(铁匠铺 tiějiàngpù - 쇠 철, 재주 장, 가게 포)’에서 왔습니다. 철의 중국어 발음이 ‘티에’입니다. ‘시나브로’는 ‘시납(施納: 베풀 시, 바칠 납)으로’설이 타당해 보입니다. 옛날 시주승(탁발승)들에게 민가에서 돈이나 곡식을 조금씩 헌납했고, 이들이 차곡차곡 싸여 다음 세상에서 귀하게 태어난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말뜻과 연결됩니다.
종종 형태소의 뜻도 명확하지 않은데 어감이 예뻐서 선호되는 낱말도 있습니다. ‘윤슬’이 대표적입니다. 햇빛이나 달빛이 비친 잔물결로 ‘물비늘’이라고도 불리는 말입니다. ‘윤’을 ‘윤기(문제는 얘는 한자어)’처럼 빛으로 해석하더라도, ‘슬’ 풀기가 난감합니다. ‘이슬’에서처럼 물을 뜻한다면, ‘빛물결’ 정도로 무난히 해석되는데, 명확한 근거가 없으니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은, 좀더 나은 언어생활을 위해 힘과 지혜를 모으면 좋겠다입니다. 국가가 투자를 늘리고, 대중도 즐겁게 참여해서 참신한 아이디어 도출과 재미있는 활동들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이번 한글날은 우리의 말과 글을 보다 가치있게 활용하는 노력, 방법, 열매들을 이야기하며 축하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수: 안희돈 교수(건국대 영어영문학과). 건국대 다언어다문화연구소 소장. 전 한국언어학회 회장
[필자 소개]
말록 홈즈. 어원 연구가/작가/커뮤니케이터/크리에이터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23년째 활동 중. 기자들이 손꼽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커뮤니케이터. 회사와 제품 소개에 멀티랭귀지 어원풀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어원풀이와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융합해, 기업 유튜브 영상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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