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유한하며 필멸하지만, 아이를 얻음으로써 불멸한다[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2024. 10. 1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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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51) 출산
‘그림자 없는 여인’ 속 인간계
천상계엔 없는 죽음 악취 진동
출산의 의미 알게된 반인반신
인간의 진정한 행복 깨달아
유한성의 슬픔 달래기 위해
끊임없이 종족 키우는 부모
인간이 자신을 극복하는 방식
게티이미지뱅크

그림자 없는 여인의 이야기를 해드리려 한다. 한 편의 판타지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전능한 카이코바트가 지배하는 천계(天界)가 있다. 이 신적인 지위의 카이코바트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딸이 있다. 그녀는 그리스 신화의 흔해 빠진 인물들처럼, 또는 기독교의 신처럼 하늘의 지배자와 인간 사이에 태어났기에 신적인 면모와 인간적인 면모 모두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가 가르쳐준 초인적인 변신술을 즐기며, 인간 어머니의 피가 이끄는 대로 인간적인 삶에 대한 동경과 애정을 가지고 살아간다(초인적인 인물이 인간 어머니의 피 때문에, 매우 보잘것없는 것임에도 인간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모험에 뛰어든다는 설정은 요즘엔 게임 속의 캐릭터가 이어받아 잘 쓰고 있다. 예를 들면 ‘데빌메이크라이’의 단테).

어느 날 그녀는 영양으로 변신해서 뛰어다니다가 마침 사냥을 나왔던 황제에게 잡혀 황후가 된다. 둘은 사이가 좋은 것 같은데, 아버지 카이코바트는 딸을 데려간 황제에게 일종의 저주를 내리기 위해 마술을 건다. 일정 기간 안에 황후에게 ‘그림자’가 생기지 않으면 황후는 황제를 떠나 아버지 곁으로 가야 하고 황제는 돌로 변하게 된다. 그런데 남은 기일이 단 사흘이 될 때까지 그림자는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황후의 몸은 유리 같아서 빛을 투과시켜 버릴 뿐 그림자를 만들지 못한다.

여기서 ‘그림자’가 바로 ‘출산을 기다리는 아이’를 상징한다. 그림자 진 인생은 곧 아이가 딸려 등이 휘게 고생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그림자는 또한, 자기 자신은 아니면서 자기 자신의 몸을 복제한 것, 곧 ‘자식’이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아이 없는 부부는 완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하듯 황제와 황후의 깨어질 것만 같은 위기의 부부 관계를 설정한다. 결국 황후는 그림자를 사러(또는 아이를 사러?) 유모와 함께 인간 세계로 간다.

인간세계란 어떤 곳인가? 천상의 존재에게 그곳은 악취 나고 혐오스러운 곳이다. 당연히 거기선 인간의 냄새가 진동하는데, 그 냄새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천상의 존재가 인간 세계로 간다는 것은 죽음이 지배하는 필멸의 세계, 짧은 삶을 사는 유한자의 세계로 간다는 것이다. 역설적이지 않은가? 그림자 없는 황후가 죽음의 세계로 가서 찾고자 하는 것이 바로 새 생명,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니 말이다.

황후와 유모가 인간세계에서 찾아가는 곳은 상징적이게도 염색업자 바라크의 집이다. 그림자조차 생기지 않을 정도로 아무런 색깔이 없는 투명한 황후와 색깔로 가득 찬 염색업자의 집은 서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지 않는가?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황후와 유모가 마주한 것은 바라크의 아내가 세 명이나 되는 시동생들과 거칠게 몸싸움을 하는 장면이다. 바라크의 아내는 부부생활에 진저리가 날 대로 나 남편과의 잠자리도 함께하지 않는 여자다. 한마디로 그녀는 가정이 싫다. 바로 이 여자에게 황후와 유모는 그림자를 팔라고 제안한다. 그 대가로 이들은 바라크 아내의 하녀 노릇을 자청하며, 그녀가 가정을 등지고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을 약속한다.

약속은 거의 성사되었다. 그림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황후와 유모는 바라크의 집에서 열심히 하녀 노릇을 하고, 바라크의 아내는 남편 모르게 세상의 쾌락에 대해 차츰 알아간다. 그러나 결국 황후는 아내의 그림자를 빼앗지 않는다. 바라크의 집에서 하녀 노릇을 하는 동안 바로 필멸하는 인간 종족에게 아이를 갖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은 까닭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동경이 있는 황후는 선량한 남자 바라크에게 공감하고 그에게서 아이를 빼앗는 죄를 결코 저지를 수 없었다.

이미 최후의 사흘은 지나가 버렸고, 그림자 없는 여인의 남편, 황제는 돌로 변해가는 중이다. 그럼에도 황후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의 행복을 희생할 수 없기에 바라크 아내의 그림자를 단념한다. 그러나 카이코바트의 은혜는 바로 황후가 이런 희생을 감내하는 순간에 내리는 법이다. 황후는 그림자를 가지게 되고 바라크의 아내는 그림자를 잃지 않으며 황제도 돌로 변하지 않는다. 마침내 황제 부부와 바라크 부부는 모두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1918년 초상화.

이 괴상한 이야기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1919)이다. 슈트라우스는 유대 왕녀와 그리스 왕녀 각각의 끔찍한 살인을 다룬 피비린내 나는 오페라 ‘살로메’와 ‘엘렉트라’를 쓴 뒤 유머로 충만한 자신의 성격에 맞는 작품,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같은 오페라 ‘장미의 기사’를 쓴다.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번 거론된 유대계 오스트리아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이 쓴 우아하고도 익살스러운 대본 위에 곡을 얹은 이 고급 오락물의 엄청난 성공 뒤에 슈트라우스는 역시 호프만슈탈과 함께 이번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같은 이국적이고도 동화 같은 오페라를 쓴다. 그것이 슈트라우스의 모든 재능이 집약된 최고의 작품이라 할 만한 저 ‘그림자 없는 여인’이다.

출산의 의미를 탐구하는 이 작품은, 인간은 자신의 슬픈 결함을 위해, 불사조처럼 새롭게 되기 위해, 영원한 죽음에서 나와 영생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종족을 키운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유한하며 필멸하지만 아이를 얻음으로써 불멸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인간은 세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유한성을 달랠 것이다. 두 가지는 그리스적이고 한 가지는 유대적이다. 그리스인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유한성, 즉 죽는다는 사실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유한성의 공포에서 벗어난다. 이와 반대편에 있는 그리스인 소크라테스는 유한한 신체의 죽음 뒤 남는 영혼의 불멸을 논증한다. 마지막으로 유대인 아브라함은 가문의 신에게, 별처럼,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을 얻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그림자 없는 여인’이 그려내는 출산의 의미는 이 세 번째에 해당한다.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유대사상가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출산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아이다. 아버지 됨은 타인이면서 나이기도 한 낯선 이와 맺는 관계다.”(김도형 외 역) 이것만큼 ‘그림자 없는 여인’의 출산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구절도 없으리라. 자궁 속을 헤매는 미래의 아이들은 곧 그 아이들의 부모가 인간적 유한성을 극복하는 방식, 아이라는 타자 속에서 계속 살아나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출산의 의의에는 뭔가 불편한 것들이 스며든다. 보수적인 부부 윤리로 색칠된 ‘그림자 없는 여인’에서, 남편과의 잠자리를 싫어하던 바라크의 아내는 회개하며 남편에게 말한다. 당신 앞에 무릎 꿇고 당신 뜻에 따르겠다고. 당신에게 아이를 안겨드리고 싶다고. 출산의 의미가 가정의 보수성 또는 여성의 종속성과 혼동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출산 자체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된다.

출산의 의미는 또 다르게 변질될 수 있다. 아이가 가정 또는 부부에게 주는 중요한 의미를 강조하는 국가의 수많은 광고가 있다. 이 의미는 인구 소멸문제와 상관없이 언제나 중요하리라. 즉 인구가 제로가 되건 폭증하건 그와 상관없이 가정에서 아이는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인구 상황이 바뀐다면 국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정에서 아이가 지니는 중요성에 대한 관심을 철회하고 지원도 철회할 것이다. 국가의 관심은 무차별적인 숫자의 증감이지 가정마다 부모마다 대면하는 아이라는 한 인격이 아닌 까닭이다. 출산을 통해 가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영혼과 만나지만, 국가는 익명적인 숫자 하나의 증가를 계산한다. 그때 가정은 국가를 신뢰하지 않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은 침묵할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국가는 국민의 아이들을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오랫동안 나는 플라톤이 심하게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플라톤이 옳다. 국가에 그토록 출산이 절실하다면, 국가는 익명적인 인구의 증감을 목적으로 삼는 일과 상관없이, 가정 안에서 출산 자체가 지니는 의미와 한 특정한 영혼의 출현을 늘 일관되게 지원할 것이다. 그것이 국가가 아이들을 공유한다는 말의 현대적 의미이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 에마뉘엘 레비나스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 현상학을 프랑스에 처음 소개한 연구자로 활동을 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탈무드’(유대교 경전) 연구를 하며 주석가로서도 활동했다. 1961년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저서 등으로 ‘타자성의 철학’을 개진한 철학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의 연구는 윤리학, 사회학, 정치학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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