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디단 감정보다 곱씹을수록 구수한… 독일식 빵 같은 투박한 詩들[시인의 서재]

2024. 10. 1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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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들어 처음으로 산 책은 라이너 쿤체의 '시'였습니다.

"봄이면 우리에겐/시가 있고 새가 있을 것"('창가의 책상, 그리고 눈이 온다')인데 "신은, 종 곁에는 계시질 않고/더 높은 곳은 우리가 가닿질"('모라비아를 향한 작은 보고') 못하니 "친구가 흙에 순응하듯"('첫 행렬 뒤따르기') 나는 오늘 '무덤'이라는 단어를 새로 배우는 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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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서재

10월 들어 처음으로 산 책은 라이너 쿤체의 ‘시’였습니다. 파르스름한 양장에 두툼한 볼륨, 그의 시전집은 비닐에 싸인 채였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책이 답답해서일까 내가 궁금해서겠지, 무지막지하게 비닐부터 뜯기 바쁜데 이상하게도 이건 그러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멀찍이 좀 떨어뜨려 놓고 살짝씩 좀 흘낏거리고 싶었습니다. 전부터 그의 시 ‘자동차를 돌보는 이유’를 내가 외우고 있는 데서 오는 일종의 반가운 마중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나먼 거리/때문이란다, 딸아//머나먼 거리 때문이지,/한 단어에서 다음 단어까지의.” 시라 할 적에 단어에서 단어 사이, 삶이라 할 적에 여기에서 거기 사이, 그 거리는 대체 얼마나 먼 걸까요. 재긴 잴 수나 있는 걸까요. 공연히 이 딱딱한 책 위에 내 머리통을 누름돌 삼아 선잠이 들었을 적에 걸려온 전화, 아빠가 위독하시단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플라스틱 자로 비닐을 뜯는 차분함으로 이 책을 시작했습니다. 1933년 구 동독 욀스니츠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1943년 열 살에 첫 시 ‘삶의 음(音)’을 쓴 그의 90세 연보 속 내가 밑줄 그은 한 줄이라면 “1976년 이해에는 시가 한 편도 나오지 않음”. (이마저도 시가 아닌가 하기에!)

라이너 쿤체의 시는 투박하리만큼 정직한 독일식 빵을 닮아 있습니다. 화려한 기교보다도 다디단 감정보다도 올곧은 정신을 기저로 짧고 간결한 시라 할지라도 몇 번을 곱씹게 하여 그 구수한 뒷맛을 오래 가져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의 시라 하면 내가 반드시 연필로 밑줄 그어가며 읽는 연유입니다. 연필 끝에서 나는 빵 냄새는 시의 허기를 우후죽순으로 불러오는 까닭입니다.

“모든 문 중 마지막 문//하지만 아직 한 번도/모든 문을 그새 다 두드려보지는 않았다.” 그의 시 ‘자살’을 읽어주고 그러니까 더 “살자” 등 두드려주었던 날, 후배는 좀 울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아무 페이지나 펴서 듣지도 못할 아빠에게 그의 시를 읽어주고 있습니다. “땅이 네 얼굴에다 검버섯들을 찍어주었다,/잊지 말라고/네가 그의 것임을.”(‘늙어’) 그래 아빠는 늙었고, 아빠는 맨발이기만 합니다만.

“봄이면 우리에겐/시가 있고 새가 있을 것”(‘창가의 책상, 그리고 눈이 온다’)인데 “신은, 종 곁에는 계시질 않고/더 높은 곳은 우리가 가닿질”(‘모라비아를 향한 작은 보고’) 못하니 “친구가 흙에 순응하듯”(‘첫 행렬 뒤따르기’) 나는 오늘 ‘무덤’이라는 단어를 새로 배우는 참입니다. 그리하여 이 가을에 왜 ‘시’라는 시를 읽어야 하냐 물으신다면 “우리도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죽은 사람’) 모르기 때문이라고 그의 목소리를 빌려 답해보는 바입니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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